제목 | 9월의 문화인물 "김병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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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서산문화원 | 등록일 | 2002-09-02 | 조회 | 13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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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연의 생애와 업적 - 김병연(蘭皐 金炳淵) : 1807∼1863, 조선후기 시인, 방랑시인 김삿갓. 짙 은 해학과 풍자를 담은 시들을 비롯, 기이한 행동으로 많은 일화를 남김. 주요시집 : 〈김립 시집(金笠 詩集)〉 그는, 이름이 병연(炳淵), 호는 난고(蘭皐)지만, 세상 사람들은 삿갓을 쓰 고 다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삿갓’이라고 불렀고, 어느만큼 인정을 나 눈 사이에서는 성(性)인 ‘김’을 붙여 ‘김삿갓’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김삿갓’이란 뜻인 ‘김 립(金 笠)’으로 주로 표기했다. 1807년(조선조 순조 7년) 3월에 한양성의 북서쪽인 경기도 양주군의 북한강 이 가까운 곳에서 태어났으며, 5세 때인 1812년 12월에 서북 지방(평안도) 의 청천강 북쪽 지역에서 일어난 〈홍경래 난〉이 그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조정의 서북지방에 대한 차별에 반발하고 관리들의 수탈과 학정에 저항해 서 일어난 이 난은, 단 10일 만에 청천강 북쪽 지역의 8개 군·현을 장악 해 버릴 정도로 백성들의 큰 호응과 적극적인 참여가 있는 정도였다. 이 때 공교롭게도 그의 할아버지인 김익순은 그 8개 군·현 가운데 하나인 선천군의 부사 겸 방어사로 있었다. 할아버지는 일단 난군에게 항복하였다 가 적진을 탈출했다. 그러나 항복한 뒤에 적을 위해 협력하고 탈출한 뒤에는 남의 공을 가로챘다 는 이유로 대역죄를 받아,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했다. 그 때 다행히 할아버 지를 뺀 나머지 가족은 목숨을 구했으나, 그는 형과 함께 황해도 곡산에 있 는 종의 집으로 가서 피해 살았다. 7세 때 가족이 다시 북한강변에 모여 살 게 되지만 그곳에서 아버지와 동생이 죽었다. 그래서 살아남은 어머니와 형 그리고 김병연만이 강원도 영월로 숨어들어 앞날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 다. 김병연은 20세 때의 봄에 영월 관아에서 실시한 백일장에 응시해서 장원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가을에 열릴 초시(생원시, 진사 시)를 포기하고 곧장 한양으로 나갔다. 그는 한양에서 신분을 숨긴 채 2년 간쯤 의도적으로 명문대가의 자식들을 사귀어 교유하면서 벼슬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실력이 출중한 그는 어렵지 않게 그 길을 찾게 되지만, 그 사이에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벼슬길은 그가 나갈 길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병연의 방랑길은 그런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더러운 벼슬길에 대한 욕망을 다 털어 버리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세상을 떠도는 자유인의 길이, 그가 택한 길이었다. 그의 시는 해학과 서정, 관조적 허무와 격물정신으로 규정된다. 부정과 불 의에 부딪치면 해학은 풍자와 조소의 칼이 되고, 절경과 가인을 만나면 서 정은 술이 되고 노래가 된다. 또한 인생을 살필 때는 눈물이 되고 한숨이 되지만, 사물들을 앞에 두었을 때는 햇살이 되고 바람이 된다. 그의 자유혼은 시의 소재나 형식에서 규범과 탈규범을 넘나들기도 한다. 한 시의 전통적 방식을 거침없이 해체해서 파격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한시 를 음이 아닌 뜻으로 읽게 한다든지, 한글을 섞어서 쓰는 시들이 그런 경우 가 될 것이다. 그는 1863년(철종 13년)의 봄에 57세의 나이로 전라도 동복현(전남 화순군 동복면)의 달천변에서 35년쯤의 긴 방랑시인의 삶을 마감했다. 그가 그곳을 죽음의 자리로 택한 것은 무등산 자락에 있는 달천이 ‘적벽 강’이라 부를 정도로 경치가 퍽이나 빼어나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 다. 김병연은 1천여편의 시를 쓴 것으로 여겨지지만 현재까지 456편의 시가 찾 아졌다. 그가 현대인에게도 익숙한 사람이 된 것은,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이야기들을, 그것도 방방곡곡을 떠돌면서 꽃잎처럼 낙엽처럼 날려버린 시들 을 이응수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모으고 정리하여, 비로소 그가 죽은 지 76년 만인 1939년에 김병연의 첫 시집인 「김립 시집」을 엮어 냈기 때문이 며, 그 속에 실린 내용과 형식이 다양한 시들과 흥미있고 통쾌한 일화들을 자료로 삼아, 여러 시인·작가들이 시집과 소설로 발간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욱이 근래에 와서 다분히 흥미 위주로 보아온 그의 시들을, 형식 의 파격성과 내용의 민중성을 문학사적으로 재평가하는 작업이 몇몇 학자들 에 의해 이루어져서 성과를 거두고 있기도 하다. 그는 5세 때부터 이곳저곳으로 피해 살아야 했고, 청년기 이후에는 방랑생 활로 일관했기 때문에 생애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대부분을 추정에 의존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그가 남긴 시와 일화들이 더욱 신비로우며 흥미롭고 감동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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