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0월의 문화인물 "신숙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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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서산문화원 | 등록일 | 2002-10-01 | 조회 | 12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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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및 업적 신숙주(保閑齋 申叔舟) : 1417∼1475, 뛰어난 학식과 문재(文才)를 지닌 조 선전기 학자·문신. 훈민정음 창제에 공을 세웠음. 주요저서 : <보한재집 (保閑齋集)> 신숙주는 본관이 고령(高靈)으로, 아버지는 공조좌참판(工曹左參判)을 지 낸 장(檣)이며 어머니는 지성주사(知成州事) 정유(鄭有)의 따님이다.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 이하 신숙주를 보한 재 선생 또는 공이라 함), 시호(諡號)는 문충공(文忠公)이다. 1417년(태종 17) 6월 13일(丁酉)에 태어난 보한재 선생은 태어나 자라면서 부터 여느 어린이들과 달랐고, 자라서 공부를 시작하자 모든 경서와 역사책 을 한번 읽으면 기억할 정도였으며 글재주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세종대왕은 유학자들이 훈고(訓誥)만 존중하고 폭넓게 공부하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438년(세종 20)에 처음으로 시(詩)와 부(賦)로 시험을 치 르는 진사시험을 실시하였다. 보한재 선생은 서울에서 단번에 으뜸을 차지 했으며 같은 해에 생원시험에도 합격을 했다. 또한 이듬해인 1439년에는 문 과(文科)에 합격했으며 전시(殿試)에서는 을과(모두 일곱명)로 급제하였 다. 보한재 선생은 조선 시대 500년 동안에 가장 뛰어난 어학자 중 한 명이었 다. 선생은 천부적인 재능으로 세종대왕이 기획했던 언어정책을 충실히 보 필하였으며 세종대왕이 1443년(세종 25)에 창제한 훈민정음의 해설서 집필 에 참여하여 다른 일곱 학자와 함께 1446년(세종 28) 9월에 {훈민정음해례 본} 편찬을 완료하였다. 1445년(세종 27)에는 권 제, 정인지, 안 지 등이 지어 올린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내용을 다른 학자들과 함께 1447년 (세종 29)까지에 걸쳐 보완하였다. 이외에도 우리 나라의 전승한자음을 정리하여 표준 한자음을 설정하려는 목 적에서 편찬한 『동국정운』이 1447년(세종29)에 6권으로 완료되고 1448년 (세종30) 출판되었는데 이때 선생의 나이는 32세였으며 서문까지 쓴 것으 로 보면, 이 편찬 사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보한재집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문충공행장을 통해 선생이 여러 나라 그 중에서도 특히, 한어(중국어), 왜어(일본어)에 능통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생은 이러한 능력을 통해 한글 창제후 세종이 계획하고 있던 표준용 우 리 나라 한자음과 표준학습용 중국 본토 한자음을, 모두 새 표음문자인 한 글로 표기하도록 하는 사업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세종대왕은 우선 표준학습용 ''중국 본토 한자음''(이를 흔히 漢音이 라 고 함)을 학습하기 위해서 명나라 태조에 의해 편찬된 {홍무정운(洪武正 韻, 홍무 8, 1375)} 에 수록되어 있는 한자의 음을 한글로 주음(注音)하도 록 하였는데 이때에도 선생은 세종대왕의 명을 받들어 중국의 요동(遼東) 에 유배당해 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을 찾아가게 되 었다. 이러한 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선생이 황찬의 말을 듣고 빨리 깨달아 막힘 없이 대화하였다고 하니, 선생의 한어(중국어) 수준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1443년(세종 25, 계해) 2월 21일에 부사직(副司直)이었던 공이, 통신사(정 사 卞孝文, 부사 尹仁甫, 왜학 역관)와 함께 서장관이 되어 10월 19일까지 9개월간 일본에 다녀와서, 당시의 견문록(見聞錄)과 일본의 인명·지명 등 을 한자음으로 기록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후에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가 1471년(성종 2)에 완성되 었다. 특히 이 책의 [조빙응접기] 항에서는 일본 사신의 응대법에 대하여 상세히 규정하여 국가행사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는데, 이 또한 일본어에 대 한 소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생은 1458년(세조 4)에 재상(우의 정)이 된 뒤에도 10여 년 동안 예조판서를 겸하여 국가 외교에 있어서도 큰 공적을 세웠다. 또한 국방에도 주력하여 1460년(세조 6, 경진) 에 동북 방면으로 자주 침입 하는 중국 동북부 지방의 여진족의 토벌책을 제시하고, 동년 7월 27일에 강 원·함길도 도체찰사 겸 선위사(宣慰使)로 임명 되어 북방 오진(五鎭)에 이 르러 강을 건너 가 여진족을 공격하여 대첩을 거두고 개선하였다. 이에 대 하여 1461년(세조 7, 신사)에 왕명으로 {북정록(北征錄)}을 저술하였다. 이와 같이 선생은 조선시대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의 여섯 왕, 30여 년 동안 학자·어학자·정치가·외교가·시인으로서 크게 활약하 고 1475년(성종 6, 을미) 6월 21일(무오)에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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