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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문화인물 "월명" 글의 상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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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0월의 문화인물 "월명"
작성자 서산문화원 등록일 2003-10-02 조회 1125
첨부  

생애 및 업적 

월 명(月 明) : 생몰년 미상, 신라 경덕왕 때의 승려·향가작가
760년(경덕왕 19) 4월 해가 둘이 나타나서 이 괴변을 없애기 위해 향가인
《도솔가(兜率歌)》를 지어서 읊자 괴변이 사라졌다 하며 죽은 누이를 위
해 《제망매가(祭亡妹歌)》를 지어 부름으로써 그 영혼을 달랬다고 전함.
《제망매가(祭亡妹歌)》,《도솔가(兜率歌)》등 향가 작품이 삼국유사에 전
함.

삼국유사 권 5 감통(感通) 제 7 ''월명사 도솔가(月明師兜率歌)'' 조를 보
면, 「월명」에 관해 단 3쪽의 기록이 남아 전한다. 문헌의 기록은 네 단락
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첫째 단락은 신라 35대 경덕왕 19년 하늘의 해가
둘이 나타난 괴변을 월명사가 <도솔가>를 지음으로써 물리쳤다는 주술적 내
용과 <도솔가> 작품 및 해시(解詩)이고, 둘째 단락은 왕이 차와 염주를 내
리자 부처님의 시자(侍者)가 받아 미륵상 앞에 놓음으로써 월명의 신통력
을 보여주는 설화이며, 셋째 단락은 일찍 죽은 누이를 위하여 <제망매가>
를 지은 경위와 작품 및 월명의 신통함에 대한 언급이며, 넷째 단락은 월명
이 머무르던 사천왕사와 대금에 얽힌 이야기 및 향가의 성격, 일연의 찬
(讚)이다.
승려로서의 월명은 사천왕사에 머문 밀교의 주술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
천왕사는 문무왕 때부터 외적(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기도를 올
린 호국불교의 대표적인 도량이다. 이와 같은 주술적인 힘으로 하늘에 두
개의 해가 나타난 재앙을 물리치는 <도솔가>를 짓게 된 것이다. 또한 월명
은 승려이면서 동시에 풍월도에 소속된 화랑이었다. 화랑은 미륵의 화신(化
身)으로 인식되어 국가적 인물로 추앙되었는데, 월명은 승려로서 화랑의 조
직에 소속되어 화랑도의 종교적, 도덕적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으
로 보인다.
월명은 문학인으로 <도솔가>와 <제망매가> 두 편의 향가작품을 남겼다. 신
라의 궁성인 월성(月城) 동쪽 조원전에서 도솔천이 있는 선덕여왕릉(선덕여
왕릉이 있는 낭산이 도리천이니, 불교적으로 그 위에 야마천과 도솔천이 있
다)을 바라보고 도솔천의 미륵불에게 꽃 뿌리며 노래를 불러 이일병현(二日
幷現)의 재앙을 물리쳤다. 또한 어린 누이가 죽자 <제망매가(누이노래)>를
짓고 재를 올려 누이를 아미타세계로 인도하였는데 그 향가는 누이의 죽음
에 대한 인간적인 슬픔을 노래한 뛰어난 서정시이다. 국문학자들은 월명
을 ''우주의 시인''으로, ''무속과 불교가 융합한 신화적 상상력의 세계에서
우주적 감수성과 능력을 지닌 신화적 인물''로, <제망매가>는 내용과 수사
에 있어 신라가요를 대표할 수 있는 작품이며 ''서정시다운 서정시가 충담사
와 더불어 월명에게서 처음으로 비롯되었다''는 등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
다.
월명은 음악인으로 달밝은 밤 사천왕사 앞길에서 대금을 불면 하늘을 지나
던 달조차 멈추어 들었다고 한다. 대금의 기원인 만파식적(萬波息笛)은 문
무왕이 죽어 동해를 지키는 호국용이 되고, 또한 죽어서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 장군, 두 영웅들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하나가 되어 문무왕의 아
들인 신문왕에게 나라를 지키는 보물로 하늘이 내려준 것이다. 월명은 만파
식적을 불며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의 모든 고통과 슬픔(萬波: 모든 파도)을
젓대소리(음악)로 잠재워주었던 신통력을 가진 승려이다.
경주에서는 매년 월명재(금년 제 11회)를 올리며 문학과 음악, 춤이 어우러
진 예술축제로 스님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구체적 행사로는 향가를 현대어
로 바꾸어 새롭게 작곡한 음악에 성악가들이 노래하는 신 신라향가 발표
회, ''만파식적제'' 등의 대금연주회, 화가들이 그림을 그린 갖가지 등불을
들고 달 밝은 밤 왕릉과 첨성대를 돌며 소원을 비는 연등행사, 월명과 관련
된 유적들을 돌아보는 문화답사 등이 있다.
문화답사는 월명이 살았던 시대를 중심으로 전개된 신라의 역사와 문화공간
에 대한 체험이다. 신라의 궁성인 월성의 성곽을 돌면서 주변의 유적들을
바라보고, 건너 낭산의 선덕여왕릉과 호국사찰인 사천왕사의 흔적과 문무왕
의 비문 받침돌로 추정되는 거북등(龜趺,귀부), 문무왕의 다비(화장)터인
능지탑, 동해변에 이르러 문무왕릉인 대왕암(산골처,散骨處: 뼈를 뿌린
곳) 등을 찾아보고, 아들 신문왕이 호국용이 된 문무왕을 만났다는 이견대
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길에 감은사지(感恩寺址)에 들러 하늘을 향해 솟은
쌍탑을 보며 조용히 만파식적이 울리는 가운데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되새겨
볼 수 있? 그밖에 시간이 있어 선덕여왕릉에서부터 경덕왕릉에 이르는 당
대 왕들의 능을 둘러본다면 더 풍성한 서라벌 천년의 역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월명은 불교의 밀교(신인종) 승려로 <도솔가>를 지어 하늘의 재앙을 물리쳤
으며, <제망매가>로 누이의 왕생(往生)을 도왔고, 대금(만파식적)의 소리로
써 외적의 침입이나 자연의 재해를 극복하고 인간의 마음을 다스렸으며, 나
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풍월도(화랑도) 정신으로 한국인의 마음에 전하여
져, 지금도 신라의 서울인 서라벌(경주)에서는 매년 10월 월명재를 올리며
그를 추모하고 있다.
올해 10월의 문화인물인 월명에 대한 조명은 곧 통일신라의 초석을 이룬 태
종무열왕과 김유신장군(흥무대왕), 문무왕(대왕암), 호국사찰인 사천왕사,
호국용이 된 문무왕을 만난 이견대, 왕을 위해 세운 감은사로 이어지며, 월
명을 통해 당대의 정치와 종교와 문화와 예술이 모두 망라되어 오늘의 우리
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월명은 통일신라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한 초월적인 종교인으로, 현실적인 화
랑도로, 예술적인 시인(향가작가)이요 대금의 달인인 음악인으로 살아왔
다. 1200여 년이 지난 지금 그에 대한 기록은 지극히 빈한하지만, 그가 남
긴 향가 두 편은 우리 국문학적 값어치로는 그 값을 헤아릴 수 없으며, 대
금(만파식적) 연주자의 조종(祖宗)으로서의 위치와 국가를 사랑하는 화랑으
로서, 호국승려로서의 행적을 보면, 그가 21 세기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로
숭상되어야 할 인물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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