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2월의 문화인물 "유길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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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서산문화원 | 등록일 | 2003-12-01 | 조회 | 9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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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및 업적* 유길준(兪吉濬) : 1856∼1914, 조선말기 개화운동가이자 한국 최초의 국비유학생. 흥사단(興士團)에 참여하여 활동했고 계산학교(桂山學校), 노동야 학회(勞動夜學會) 등을 설립하여 국민계몽에 주력하는 한편, 국민경제회(國 民經濟會) 등을 조직해 민족산업의 발전에도 공헌 하였음. 저서로는 최초 의 국한문혼용 기행문인 《서유견문(西遊見聞)》, 《노동야학독본(勞動夜學 讀本)》, 《대한문전(大韓文典)》 등이 있음. 구당 유길준(1856-1914)은 조선조 말에 선비 가문에서 ''신동''으로 태어나 1876년 개항 이후 열강의 세력 침투 속에서 급변하는 그리고 일제의 강점 에 의해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아야 했던 국가적 위기 속에서 살다 간 개화 기의 선구자적인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당대 저명한 유학자들로부터 전통한학을 수학하여 과거에 합격할 정도로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그 뒤 박규수와의 만남을 계기 로 신문화와 접촉하게 되었다. 1881년 5월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그곳에서 최초의 일본 유학생으로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공부 할 수 있었다. 이 학교의 설립자이며 일본에서 문화개화론자로 이름을 떨치 고 있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집에 기거하면서 그와의 친분이 시작 되었다. 이곳에서 새로운 서양의 학문과 사상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신문 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돌아와서 박영효의 부탁으로 우리나라에서 신문을 창 간할 수 있는 기초를 다져놓았다. 1883년 7월 견미보빙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최초의 미국 유학 생이 되어 보스턴시 근처의 당대 명문 사립고등하교 더머아카데미 (Governor Dummer Academy)에 입학하여 서구의 민주주의, 국제법 등 서양 의 사상과 문물을 직접 접하고 배울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당시 피바디 박 물관의 관장으로 있던 생물학자 에드워드 모스(Edward S. Morse)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2년 정도 미국에서 체류한 후 귀국 길에 유럽 여러 곳을 돌아 보고 왔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갑신정변에 연루된 죄로 체포되어 그후 7 년간 연금되어 지내게 되었다. 그 동안 그는 방대한 {서유견문}을 탈고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본격적으로 서양의 사상, 문물 등을 소개한 개화기의 대표적인 것이다. 연금에서 해제된 이후 군국기무처 회의원, 내각총서, 내 무대신을 역임하면서 갑오개혁을 중심에서 이끌어갔다. 이때 많을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그가 일찍부터 주장하던 과거제도 폐지시켰다. 그는 단발령 의 실시를 밀어부쳐 국민들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친로정권이 수립되면서 정국이 급변하여 전 내각 대신들에 대한 포살령이 내려지자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그 후 1907년 8월 귀국할 때까지 12년 가까이 망명생활을 하였다. 그 시절 그 는 한때 국내 개혁을 위해 일본사관학교 출신 청년장교들과 쿠데타를 모의 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고 4년 간 유배에 처해져 오가사와라제도, 하치조섬 에서 지내야만 하였다. 이 불우하고도 긴 망명시절에 그는 국어문법을 연구 하였으며 국민들을 계몽시키기 위해 외국의 독립사, 멸망사 등 역사에 관 한 책들을 번역하였다. 그리하여 귀국 후 {프러시아 후레드릭대왕 7년전사} (普魯士國厚禮斗益大王의 七年戰史)(1908), {영법로토제국 크리미아전사} (英法露土諸國의 哥利米亞戰史)(1908) 등을 간행할 수 있었다.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황제가 물러난 직후 유길준은 망명자 신세 에서 벗어나 귀국하면서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 직접 민중들 속에서 활동하 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제수된 특진관 자리를 사양하고 재야에 서 국민들의 자질을 향상시키고 애국심을 고양시키기 위해 국민교육을 실시 하고자 하였으며 지방자치제를 실현시켜 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흥 사단을 설립하여 수십권의 교과서를 편찬하고, 교사를 양성하는 등 전국적 인 국민교육의 체계를 세워보고자 하였다. 또 한성부민회를 설립하여 각 방 마다 소학교를 설립하고 그 방회에서 운영하도록 하여 국민교육의 지방자치 화를 추진하였다. 이렇게 그가 주장하고 실천한 목적은 우리나라의 ''광 복''에 있었으며 궁극적으로는 국민들의 자질을 향상시켜서 그가 우리나라 에 가장 이상적인 정체라고 주장한 입헌군주제를 실현시켜 우리나라를 문명 국 대열에 올려놓는 데 있었다. 또한 유길준은 일찍이 국어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국어를 사용하 여 교육하고 계몽하여 국민의 자질을 향상시키고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하 였다. 그래서 그가 추진한 소학교육도 국어사용을 원칙으로 하였다. 우리나 라 최초의 신문도 국한문혼용체로 창간하고자 하였다. {서유견문}도 국한문 혼용체로 저술하였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의 국어문법을 연구한 최초의 학 자로서 30여 년간을 연구하여 국어문법책인 {대한문전}을 저술하였다. 이와같이 유길준은 우리나라 개화기 선구자로서 이론을 갖춘 뛰어난 개화사 상가이자 실천력을 갖춘 개혁정치가였으며, 민중과 함께 하고자한 개화운동 가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국어를 보급하고 연구한 우리나라 최초 의 국문학자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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