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메뉴 닫기
서브페이지 배경
전통혼례(이용석, 황순녀씨 부부) 글의 상세내용

『 전통혼례(이용석, 황순녀씨 부부) 』글의 상세내용을 확인하는 표로 제목, 작성자, 등록일, 조회, 첨부, 내용으로 나뉘어 설명합니다.

제목 전통혼례(이용석, 황순녀씨 부부)
작성자 청양문화원 등록일 2003-05-02 조회 891
첨부  
우리의 이웃; 이용석·황순녀씨 부부

“결혼식 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가난 때문에 환갑 넘어서 결혼식 올리고 눈물 목면 송암1리 이용석·황순녀
씨 부부 “결혼식을 올리러 사모관대 쓰고 장승공원으로 걸어가면서 하느님
이고 땅님이고 신이 계시다면 이 세상에 나처럼 슬프고 어려운 사람이 다시
는 없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목면 송암1리에 사는 이용석(63)씨는 어려운 살림살이 때문에 환갑이 넘어
서야 부인 황순녀(57)씨가 원하던 결혼식을 올렸다.
지난 20일 제5회 칠갑산장승문화축제때 장승공원 잔디마당에서 가족들과
동네사람들은 물론 장승축제를 구경온 사람들을 하객으로 모시고 장승축제
행사의 일환으로 무료 전통혼례를 치뤘다.
가난한 사람끼리 만나 서로 의지하며 함께 살림을 한지 20년만이다.

“이렇게 결혼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머리숙여 감사
드립니다. 군수님을 비롯해서 각 기관장님들께 너무나 큰 은혜를 입었고 복
영수 전무님은 나의 철천지 한을 풀게 해 줬습니다”
‘없는게 죄’라서 부인 황순녀씨에게 결혼식도 못 올려주고 살았다는 이용
석씨.

어려서 집이 남의 산골 논 몇마지기 소작하던 형편으로는 7남매 9식구가 살
아가기가 힘들어 둘째 아들이면서 장남 노릇을 해야했던 이씨는 16살때 머
슴살이를 시작으로 18살에 혼자 서울로 상경, 지게 품팔이, 거름 푸는 일
등 험한일을 많이 했다.

그러다 5·16군사 쿠데타가 나자 고향(공주시 우성면 보흥리)으로 내려왔으
나 먹고 살길이 막막해 보령의 성주탄광에서 취직해 일하다 발파로 인해
두 손에 상처를 입어 사용할 수 없게됐다.
“나 살아온 얘기 하면 피눈물 납니다. 어려운 걸로 치자면 말할수가 없지
요.”

그 일로 팔꿈치부터 손가락 끝까지, 무릎부터 발까지 신경이 죽어 버렸다.
또 열손가락 첫째마다기 없어지고 둘째마디는 모조리 굽어 손을 제대로 쓸
수 없게됐다.
다시 서울로 가서 리어커 장사를 했다.

“지게질을 해서 모은 총 재산인 2천원으로 물렁감을 사서 팔려고 리어커
끌고 장사를 나갔는데 팔기도 전에 노점상 단속에 걸려 용두파출소로 연행
돼 갔어요. 뚝섬 법원에 가서 즉결재판을 받는데 벌금 5천원이 없어서 못
나오게 생겼는데 거기 잡혀왔던 다른 노점상이 대신 내 줘서 풀려나와 시
장 오가는 사람들 보따리 들어주면서 다시 시작했습니다”

보따리 심부름 해서 돈을 조금 모아 길에 앉아 대파장사를 했다. 그러다 성
실한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이 가게를 빌려줘 채소 도매상을 하게 됐고 어느
해 감 장사를 위해 아직 익지않은 시골의 감을 사재기 했다.
“그때가 이용석의 삶을 마감하는 때가 되어버렸습니다. 주위에서 돈을 빌
려다 감을 사 놨는데 그해 서리가 일찍와서 감도 익기전에 망했지요. 술을
그때 많이 먹게 됐고 오스카극장 앞 차가운 아스팔트에서 자며 지냈는데 인
생 마감되는 줄 알았습니다. 기구한 인생 다 말 못하지요”

몸이 성치 않으니 ‘나는 결혼을 할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포기하고 살았
던 이씨는 대놓고 밥을 먹던 식당 주방에서 일하던 부인 황씨를 만나게 돼
고향이 같은 공주라는 이유로 사귀게 되고 살림을 시작했다.
그때 나이 마흔네살이었지만 동생들 결혼 시키느라 자신은 결혼식을 올릴
형편이 못 됐다.

“사람 사는 게 참 맘대로 안되더라구요. 함께 산지 4개월쯤 지나 달거리
가 없어 임신한 줄 알고 좋아서 이것 저것 사다 먹이고 했는데 하혈을 해
서 병원에 가니까 임신이 아니고 자궁에 혹이 생겨 수술해야 한다고 합디
다. 돈도 없고 저 사람 그때까지도 주민등록증이 없어 병원에 가도 받아 주
지 않고 사람은 죽어가고 살릴려고 이를 악물고 아무리 사정해도 안되더라
구요. 우리가 사는 방이 둘이 겨우 누울 정도 였는데 그곳에 다 죽어가는
사람을 뉘여놓고 이렇게 죽는구나.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장사를 치뤄야 하
나 참 막막했습니다”

고향으로 내려와 시집간 여동생의 주민등록증을 이용해 공주의료원에서 수
술을 했다.
그 일로 이들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다.
퇴원후 보따리 행상부터 이를 악물고 일을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송암리는
13년전에 이사왔다. 남의 묵은 과수원을 빌려서 농사를 지어 막내동생 결혼
까지 시켰다.

그때 부인 황씨는 “나도 결혼식 못했다”는 말이 가슴에 남아 나도 이제
결혼이라는 걸 해 봐야겠다 싶었는데 장애의 몸과 늙어서 더이상 돈을 벌수
가 없었다.
생각다 못해 지난해 면사무소 사회복지사에게 무료결혼식이 있으면 시켜달
라고 부탁하게된 것이다.

이번 결혼식은 칠갑산장승보존회에서 마련했으며 주위에서 많은 관심을 가
졌다.
칠갑산샬레호텔 최의환 사장은 신랑 이용석씨를 위해 양복, 와이셔츠, 넥타
이 구두 등 예복 일절을 마련해 줬고 칠갑사진동우회에서 기념사진을, 그밖
에 서울 출향인 김창호씨를 비롯 지역의 정문스님, 복권승, 이주호, 이능
구, 임무수, 최대규, 김광명, 박명규, 지체장애인지회, JC, 구기자농협 등
에서 냉장고, 전자렌지 등의 여러 상품을 전달했다.

“결혼식을 도와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을 꼭 전해 주세
요”
이용석씨는 송암1리서 반장일을 본다. 낯선곳에 와서 자신이 뿌리 내리고
살 수 있도록 동네 어른들이 잘 해주셔서 몸이 성치 않은 자신이 마을을 위
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는 생각에 힘 닿는데까지 마을을 위해 최선
을 다할 생각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