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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세 안재홍(民世 安在鴻) 선생(1891.11.30 - 1965.3.1)
민세는 1891년 11월 30일, 경기도 평택군 고덕면
율포에서 순흥안씨 안윤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한
학을 배운 민세는 1907년 17세에 경성기독교청년회 학관에서 3년간
수학하고 이곳에서 많은 애국지사들을 만나 민족주의 의식을 키워
갔다. 일제가 한국을 강제병합한 직후인 1910년 9월에 일본으로 유
학한 민세는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를 졸업하고 1914년에 귀국, 중
앙학교 학감 및 기독교청년회 학관 부관장 등을 역임하며 교육계에
투신하였다.
3·1운동에 적극 가담한 민세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를
지원할 목적으로 비밀리에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해 총무로 활
약하였다.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전달하고 국내 정세
를 임시정부에 보고하는 등의 활동이 발각되어 일제에 피체된 민세는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 후 민세는 조선물산장려
운동에 참여하였고, 시대일보 논설기자, 조선일보의 주필과 부사장·
제6대 사장을 역임하는 등 언론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
년대 중반 일제와의 타협론인 자치론이 거론되고 있을 때, 선생은 비
타협주의노선을 견지하며 사회주의 세력과의 합작을 통해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체로서의 <신간회>를 결성하였다. 1929년 11월에 광주학
생운동의 진상을 보고하는 민중대회 개최를 주도한 선생은 또다시 일
제에 피체되어 고초를 당하였다. 1931년 9월 만주침략을 단행한 일제
가 한국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만들고 우리 민족문화를 말살하고
자 획책했을 때에, 민세는 정약용 문집인 『여유당전서』를 교열·간
행하는 등 고전연구에 심혈을 쏟으며 조선학운동을 주도, 민족문화를
수호하였다. 그리고 1936년에 중국에 여러 군관학교에 한국 청년학생
들의 입교를 알선하여 독립투사로 양성하는 일에 관여했다가 투옥되기
도 하였다. 민세는 우리 고대사와 사상연구에 몰두하면서 한글보급운
동을 전개하였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9번째 투옥되
어 옥고를 치루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정국에서 여운형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좌우합
작의 민족국가수립을 위해 진력하였으며, 좌·우의 극한 대립상황에
서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를 주창하여 우리 민족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1947년 남조선과도정부 민정장관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1950년에 고향 평택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선출되었으나 6.25동난 중
납북되었다. 납북된 후에도 북한에서 납북인사 중심으로 결성된 <평화
통일추진협의회> 최고위원으로 평화통일을 위해 힘쓰다가 1965년 3월
1일 65세를 일기로 평양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정부에서는 일제하에서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고 해방 후에는 통일된
자유민주주의의 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선생의 애국정신
을 기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으며 위패를 국립묘지
에 모셔두었다. ㅇ 전시기간:2002. 07. 01 ∼ 07.31
ㅇ 전시장소:독립기념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상설 전시실(제2∼3전시
관 통로)
ㅇ 전시내용
1. 민세 안재홍
2. 민세의 생가 - 경기도 평택 고덕면 두릉리 646(경기도 기념물 제
135호 지정)
3. 민세의 친필 약력
4. 민세가 재학할 당시의 황성기독교청년회 학관의 학생들(1907)
5. 황성기독교청년회관(Y.M.C.A : 1910) - 처음으로 근대학문을 접하
고 이곳에서 이상재, 남궁억 등의 애국지사들과 만났다.
6. 대한민국청년외교단 활약을 상세히 전하고 있는 상해판 『독립신
문』 1919년 1월 1일자 보도기사
7. 일제의 정보문서 - 안창호가 민세에게 보낸 임시정부 국무원 건의
문서(1919. 9. 8) - 청년외교단 활동에 대한 감사와 조국의 독립을 위
해 분발을 권유하는 내용
8. 시대일보에 재직할 당시 민세(둘째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필 3549
9. 조선일보 부사장 재직시 집무실에서 민세(1929)
10. 신간회에서 함께 민족연합전선운동을 전개한 홍명희와 민세 (현충
사)
11. 백두산을 답사하고 천지에서 (1930. 8, 가운데) - 답시기인 <백두
산 등척기>를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
12. 치안유지법과 보안법위반으로 유죄판결받은 민세의 판결문
(1937) - 중국 군관학교 입교생을 알선죄로 일제에 피체되었다.(자
437 -44)
13. 한글문화보급회가 조선어학회·진단학회와 공동 주최한 지도자양
성 강습회에 참여한 민세(1939. 2. 23)
14.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루었던 조선어학회 동지들(1949.
6) 첫줄 왼쪽에서 3번째
15. 남조선 과도정부 민정장관 취임연설을 하는 민세 (1947. 2. 10)
16.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릴 당시 창덕궁 비원에서 조소앙과 위드마이
어장군과 함께 한 민세(가운데)
17.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한 요인들과 자리를 함께 한 민세
18. 좌우합작위원회 위원들과 함께 한 민세(1947. 12. 10, 앞줄 왼쪽
에서 4번째)
19. 민세를 포함한 15인의 납북독립유공자 위패 봉안식(1911. 11. 21)
(출처: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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