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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신숙 글의 상세내용

『 2002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신숙 』글의 상세내용을 확인하는 표로 제목, 작성자, 등록일, 조회, 첨부, 내용으로 나뉘어 설명합니다.

제목 2002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신숙
작성자 서북구문화원 등록일 2002-11-01 조회 1086
첨부  

강재(剛齋) 신숙(申肅) 

신숙 선생은 1885년 12월 경기도 가평군 군내면 향교리에서 신석범(申錫範) 

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연길(連吉)이고, 12세에 태봉(泰鳳), 21세 때 

태련(泰鍊)으로 바꾸었다. 신숙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 계기는 1920년 국외 

로 망명하면서 부터이다. 호는 강재(剛齋)·시정(是丁)·치정(癡丁) 등을 

사용하였다. 

어려서 신동으로 불린 선생은 12세에 이규봉(李圭鳳)에게 한학을 배웠으 

며, 19세가 되던 1903년 4월 강원도 양구 의병장 최도환(崔道煥)의 둘째 

딸 최백경(崔百卿)과 혼인하였다. 이 해 12월 동학에 입교하여 활동하였 

고, 1907년 대한제국 탁지부 인쇄국에서 근무하면서 김남수(金南壽)·김남 

규(金南奎) 등과 함께 청파동에 문창학교(文昌學校)를 설립하고 육영사업 

에 진력하였다. 

1909년 친일행각을 펼친 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 처단을 계획하였으나 일 

제의 감시가 삼엄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으며, 이후 천도교 대구 대교구 

장을 지내는 등 천도교에서 활동하였다. 3·1운동 직전에는 독립선언서의 

교정과 인쇄작업을 맡았으며, 3·1운동 이후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여 활 

동하다가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20년 4월 선생은 독립운동을 본격적으 

로 실행하기 위해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 도착한 선생은 먼저 천도교 상해전교실을 설치하였고 천도교 이념 

에 바탕을 둔 통일당(統一黨)을 조직하였다. 동년 9월 선생은 북경으로 가 

서 군사통일회의 의장에 선출되어 군사단체의 통일과 무장독립운동 노선을 

주장하였다. 1923년에는 국민대표회의에 창조파 대표로 참여하여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국민대표회의가 해산된 뒤 창조파는 국호를 ''한(韓)''으로 하 

는 국민위원회 정부를 세웠으며, 선생은 내무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 

다. 이후 블라디보스톡·길림·하얼빈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1927 

년 이도하자(二道河子) 부근의 송봉산에 정착하였다. 선생은 이곳에다 신창 

학교(申昌學校)를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고, 한인농장을 연합하여 자치 

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28년 1월 신민부(新民府)의 민정위원이 되어 3부(신민부·정의부·참의 

부) 통합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30년 신민부를 중심으로 한국독립당이 창 

당되자 여기에 소속된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으로 활약하였다. 만주사변으로 

일제의 침략이 만주에까지 미치자 한·중 연합전선의 결성에 노력하여 한중 

토일연합군(韓中討日聯合軍)을 결성하여 대정자령 전투 등을 승리로 이끌었 

다. 하지만 노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만주로 가다가 영구(營口)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다 석방되어 일제의 감시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선생은 동포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귀국을 돕는 일을 하 

였으며, 1946년 귀국 후에도 동포들의 귀환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천도 

교 보국당(保國黨) 대표로 조국의 분단을 막기 위해 좌우합작위원회에서 활 

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좌절되자 선생은 천도교 활동을 하면서 독 

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 정착에 힘쓰다가 중풍으로 쓰러져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67년 11월 가회동 자택에서 8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 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ㅇ 전시기간:2002. 11. 01 ∼ 11.30 

ㅇ 전시장소:독립기념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상설 전시실(제2∼3전시관 통 

로) 

ㅇ 전시내용 

1. 입법의원 시절 신숙(1948) 

2. 대동단선언(大同團宣言) 

- 1919년 11월 신숙은 이강(李剛).김가진(金嘉鎭).전협(全協) 등과 함께 대 

동단을 결성하고 활동하였다. 대동단선언에는 신태련(申泰鍊)으로 나와 있 

다. 

3. 보성사(普成社) 터 

- 신숙은 1919년 3.1운동 직전 보성사 인쇄소에서 독립선언서 교정과 인쇄 

작업에 참여 하였다. 

4. 북경 천도교 전교실(傳敎室) 창립기념(1922) 

- 앞줄 중앙 신숙, 왼쪽 박래홍, 2열 4번째가 최동오(崔東旿) 

5. 신숙 사진(36세) 

6. 1920년대 초 상해 통일당(統一黨) 총리 시절 이념으로 제시한 3대 강령 

삼본주의(三本 主義) 

- 민본정치(民本政治)의 실현 

- 노본경제(勞本經濟)의 조직 

- 인본문화(人本文化)의 건설 

7. 1930년 초 한국독립군의 전투지였던 납림(拉林)역 전경. 신숙은 한국독 

립군 참모장으로 참여하였다. 

8. 대전자령(大甸子嶺) 전투가 벌어졌던 고개 정상 부근. 1933년 7월 한국 

독립군 등 한·중 연합부대가 일본군 2개 대대 병력을 완전 섬멸하는 승리 

를 거두었다. 

9. .한중연합군 주요 전투지역(지도) 

10. 좌우합작위원회(左右合作委員會) 창립기념(1946.12) 

-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신숙. 가운데가 김규식(金奎植) 

11. 일랍계(一拉溪) 농촌에서 보석(保釋) 석방기념으로 가족들과 함께(중 

국 길림. 1937) 

12. 신숙 자서전 나의일생 

13. 결혼 60주년기념, 부인 최백경 여사와 함께(1965) 

14. 광복동지회 창립기념(1960) 

- 앞줄 오른쪽에서 6번째 신숙 

15. 민주당 정권 수립 직후 장면총리와 함께한 신숙(1960) 

16. 신숙 묘소 사진(서울 성북구 수유동) 

(자료출처: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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