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02년 3월 이달의 문화인물-이상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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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서북구문화원 | 등록일 | 2002-03-01 | 조회 | 13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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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c="http://www.mct.go.kr/uw3/glosend.csh/Yi.jpg? db_name=mocs_db&glo_oid=@48751|9|5&content_type=image/pjpeg&file_ ext=.jpg"> 이상재(月南 李商在 : 1850-1927) : 독립운동가, 시민운동가, 종교 인, 언론인, YMCA에서 민족운동 전개, 일제치하 해학과 기지로 한국인 의 정신고양 1850년 충남 한산(현 서천)에서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16대 손으 로 출생한 이상재는 1881년 박정양이 이끄는 신사유람단원으로 일본 에 가면서부터 정치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된다. 특히 그는 개화 독립운 동에 앞장서 1897년부터 독립협회를 윤치호와 같은 여러 신진인사들 과 함께 조직하고, 토론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하여 주권 사수를 외쳤 다. 이로 인하여 3년여의 옥고를 치르지만 그것이 그에게는 일생의 일 대 전환기가 된다. 거기서 그는 선교사들이 차입한 기독교 서적을 읽 고, 마침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다. 출옥이후 그는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들어가 한국인 지도자로 그 일생을 보내고, 만년에는 조선일보 사장으로 일하며, 동시에 1927년 2 월 좌우 일치의 신간회를 조직할 때 그 회장으로 피선된다. 하지만 한 달 후인 1927년 3월에 세상을 떠난다.
그는 55세의 나이로 YMCA에 들어가 그의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 으며, 젊은이들에게 불타는 민족애와 신앙을 심어 주어 민족의 미래 를 기약하여 나갔다. 그는 YMCA활동을 통하여 민영환과 같은 상류층 의 애국지사들과 이승만이나 윤치호와 같은 신진 지식인들이 와서 활 동할 수 있는 기회와 장소를 제공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고도의 해학(諧謔)으로 일제 압제하의 우리 겨레에게 희 망과 웃음을 주어 후련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지사이기도 하였다. 그 는 일제 고관, 가령 이등박문(伊藤博文)과 같은 사람들 앞에서도 신랄 (辛辣)할 정도의 해학을 서슴치 않고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사민(四民) 사상을 혁신하는 교육을 실천하 기도 하였다. 곧 YMCA에서 직업교육을 실시하여 직업의 소중함을 알 게 하여 한국 근대화의 길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음악과 체육을 가르쳐서 한국인의 생활에 지덕체(智德體)를 겸비한 인간상을 건설해 나가도록 하였다.
그는 민족을 앞날을 위하여 민립대학 설립을 추진한 일이 있으며, 조 선일보 사장을 맡았던 일도 있다. 일본계가 장악하고 있었던 조선일보 가 강력한 민족지로서 출발하게 하기 위해서 그랬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공로 그리고 그의 가장 거대한 공적은 그가 서거 하기 한달 전에 양단 된 국내독립운동의 2대 계파(사회주의 계와 민족 주의 계)를 단일하게 묶는 신간회 회장을 맡았던 일이다. 그가 회장 을 맡았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양대 계파가 다 같이 존경하고 추앙 할 수 있는 지도자가 이상재, 그 사람밖에는 없었다는 뜻이 된다.
그는 이처럼 일제 하 우리 겨레의 참다운 민족의 지도자로서 맑고 깨 끗하고 웅대한 겨레의 얼과 정신을 드높이고 서로가 사상이 다르고 신 념이 다를지라도 한 마음으로 손잡고 나아가게 한 우리 현대사의 가 장 존경할 만한 민족의 지도자요 그 목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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