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02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이필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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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서북구문화원 | 등록일 | 2002-03-01 | 조회 | 14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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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주(1869. 12. 22∼1942. 4. 21)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신민회가 발각되어 주요 인사들이 대거 체포되 는 상황에서 일제의 검거망을 피한 이필주는 1911년 경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후 목사가 되어 정동교회(貞洞敎會)에서 근무하면서 조국독립에 대한 이상을 품고 이상재(李商在)·최병헌(崔炳憲)·최성 모(崔聖模)·오화영(吳華英)·신홍식(申洪植)·박동완(朴東完)·오정 도(吳貞道)·현순(玄楯) 등과 자주 만나 친분을 두터이 하였다. 이필주는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이 구체화되던 1919년 2월 27일 자기 집에서 이인환(李寅煥)·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함태영(咸 泰永)·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오화영·최성모·박동완 등 기독교측 대표들과 만나 함태영이 최린(崔麟)으로부터 가져온, 최남선 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서류 초안을 회람하고, 기독교측의 민족 대표로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기로 하였다. 다음날인 28일 밤 재동(齋洞) 손병희(孫秉熙)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 들과 만나 최종적으로 독립운동 전개에 따른 계획을 검토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仁寺洞)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민족 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 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 다. 1921년 11월 4일 경성감옥에서 출옥한 후 서울의 여러 교회에서 종교 활동과 육영사업에 힘쓰다가, 말년에는 수원 남양교회(현재 화성시 남 양동 소재)에서 목회생활을 하면서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요를 거부하 는 등 일제에 항거하다가 1942년 4월 21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 다.
ㅇ 전시기간:2002. 03. 01 ∼ 03.31 ㅇ 전시장소:독립기념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상설 전시실(제2∼3전시 관 통로) ㅇ 전시내용 1. 이필주 2. 공옥학교 전경. 1904년 이필주는 공옥학교 체육교사로 근무하였다. 3. 상동교회 1907년 전덕기(全德基)를 중심으로 애국지사들이 상동교회에 모여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를 결성하였다. 이필주는 상동청년 회에 가입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4. 대한기독교청년회(YMCA) 회관. 1910년 이필주는 대한기독교청년회 초대 체육교사를 지냈다. 5. 정동제일교회 전경. 1918년 이필주는 정동교회 담임목사가된 후 정동교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6.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식 장면. 7. 민족대표 33인의 명의로 발표된 독립선언서. 8. 1919년 3·1운동 당시 만세시위 장면 기록화. 9. 3·1운동에 호응하여 철시한 상가. 10. 3·1운동 민족대표 공판 보도기사(『동아일보』1920년 7월 27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는 33인이지만, 재판에 회부된 사람 은 48인이었다. 11. 3·1운동 민족대표 재판기록 12. 경성감옥 전경. 이필주는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 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3. 3·1독립선언유적지 : 태화관지(泰和館址) 1919년 3·1운동시 민족대표가 모여 독립선언식을 개최한 장소이 다.(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14. 3·1독립운동기념터 : 보신각지(普信閣址)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문 낭독을 시발로 3·1독립만세운동이 서 울 전역으로 확산되었을 때, 시위 중심지가 된 곳이다. 15. 이필주목사 기념비(경기도 화성시 남양교회) 16. 이필주 묘소(서울 국립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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