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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2002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김 혁 글의 상세내용

『 2002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김 혁 』글의 상세내용을 확인하는 표로 제목, 작성자, 등록일, 조회, 첨부, 내용으로 나뉘어 설명합니다.

제목 2002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김 혁
작성자 서북구문화원 등록일 2002-03-31 조회 1329
첨부  

src="http://www.independence.or.kr/NEW/news/monthly/monthly_leade 

r_kr/phot/200204i.jpg">김 혁(1875∼1939) 

 

 

 

 

 

1900년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위로 임관한 

뒤, 시위대(侍衛隊)에서 근무하는 동안 일제의 침략을 목격하면서 항 

일 민족의식이 더욱 고양되었다. 육군 정위로 근무하던 1907년 8월 일 

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자 낙향하여 독립운동에 나 

설 것을 결심하였다. 

경술국치 직후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입교하여 활동하면서 민족의식과 

자주독립 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리하여 3·1운동이 발발하자 고향인 

용인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뒤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서간도지역의 대종교 독립운동 단체를 찾아가 흥업단(興業團) 부 

단장으로 활약하면서 본격적인 항일 무장투쟁에 나섰다. 그 뒤 북간도 

로 옮겨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참여 

하여 활동하면서 청산리대첩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자유시참변 이후 1925년 3월 북만주 독립군 단체의 통일 조직인 신민 

부(新民府) 결성을 주도하여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이로 

써 남만주의 정의부(正義府)와 참의부(參議府), 북만주의 신민부로 정 

립된 3부(三府) 시대를 열었다. 3부는 관할 지역 한인을 보호하고 자 

치기능을 담당하는 군정부로서의 역할과 함께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 

여 큰 전과를 올렸다. 또한 김혁은 신민부에서 설립한 성동사관학교 

(城東士官學校) 교장에 임명되어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928년 1월 25일 중국 위하현(韋河縣) 석두하자(石頭河子) 

역에서 일본 경찰과 중국 경찰의 합동 습격으로 10여 명의 신민부 간 

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신의주로 이송되어 1929년 6월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신의주형무소·평양형무소·서대문 

형무소에서 9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36년 8월 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가출옥한 후, 고향에서 요양하였으 

나 1939년 4월 23일 6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 

다. 

 

ㅇ 전시기간:2002. 04. 01 ∼ 04.30 

ㅇ 전시장소:독립기념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상설 전시실(제2∼3전시 

관 통로) 

ㅇ 전시내용 

1) 인물사진 

2) 해산식 직전의 시위대(1907. 8. 1). 

김혁은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시위대에서 근무하 

였다. 

3) 1907년 강제 해산령에 봉기한 대한제국 군인들.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자 김혁은 낙향하여 독립 

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4)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제1회 졸업식 광경(1920. 9. 9) 

김혁은 졸업식에서 축사를 통해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5)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훈련소. 

1920년 이후 김혁은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에서 활동하였다. 

7)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 승전 기념.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김혁은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9) 청산리대첩 당시 독립군이 사용하였던 탄약과 탄띠. 

10) 3부(府) 관할도. 

1925년 북만주 독립군 단체의 통일조직으로 신민부(新民府)가 결성되 

어, 남만주의 정의부·참의부와 함께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1) 신민부의 주활동 지역이었던 영안(寧安)역. 

김혁은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2) 신민부에서 설립한 성동사관학교터[목릉현(穆陵縣)소추풍(小秋 

風)]. 

김혁은 성동사관학교 교장에 임명되어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3) 김혁 체포기사(『동아일보』1928. 3. 22). 

* 김혁이 9년 동안 옥고를 치뤘던 형무소 

14) 신의주형무소 감방 

15) 평양형무소 

16) 서대문형무소 

17) 김혁선생독립운동기념비(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18) 김혁(김학소) 묘소(서울 국립묘지). 

(출처: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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