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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2002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민종식 글의 상세내용

『 2002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민종식 』글의 상세내용을 확인하는 표로 제목, 작성자, 등록일, 조회, 첨부, 내용으로 나뉘어 설명합니다.

제목 2002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민종식
작성자 서북구문화원 등록일 2002-05-31 조회 1330
첨부  

src="http://www.independence.or.kr/NEW/news/monthly/monthly_leade 

r_kr/phot/200206i.jpg">민종식(1861∼1917) 

민종식(閔宗植) 선생은 1861년(철종 12) 3월 경기 

도 여주에서 아버지 민영상(閔泳商)과 어머니 기계 유씨 사이에서 3 

대 독자로 태어났다. 가문은 여흥 민씨로, 부친은 명성황후의 인척이 

었다. 아버지는 이조·호조 등 여러 판서를 역임하는 등 광무황제의 

신임을 받았다. 

선생 역시 20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판을 역임하는 등 조 

정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1895년 을미사변으로 국모가 시해되자, 선 

생은 벼슬길을 과감하게 버리고 충청도 정산으로 낙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선생은 의병 봉기를 모의하였고, 의병장 

에 추대되었다. 이에 1906년 3월 15일(음력 2월 21일) 광수장터(현재 

의 예산군 광시면)에 600여 명의 의병이 모여 1차 봉기를 하였다. 선 

생의 의병 부대는 청양군 화성면 합천 일대에 진을 쳤으나 3월 17일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패배하였다. 

이후 선생은 재기를 노리다 5월 9일 홍산군 지티동에서 60여 명의 동 

지와 함께 거사를 계획하였다. 2차 봉기에 나선 선생의 의병 부대는 5 

월 13일 서천의 관아를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였다. 이어 남포읍성을 4 

일 간의 치열한 공방 끝에 함락하여 위세를 떨쳤다. 드디어 1천여 명 

에 달하는 선생의 의병부대는 5월 19일 일거에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홍주성을 점령하고 난 뒤 선생은 광무황제에게 상주문을 올려 을사오 

적 및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처단과 의병을 일으킨 뜻을 받아 

들일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홍주성이 대규모 병력을 파견한 일본군 

에 의해 31일 새벽 4시 점령되어, 이 계획은 중지되었다. 이 때 학살 

된 양민은 300여 명에 이르렀고, 체포된 의병 수도 145명에 달했다. 

선생은 홍주성을 탈출한 뒤 재기를 노렸으나 11월 20일 공주에서 붙잡 

히고 말았다. 선생은 체포된 뒤 서울로 압송되어 여러 차례 심문을 받 

았으며, 주로 궁중과의 관련성에 관하여 집요한 추궁을 받았다. 이 

때 심문한 일본 경찰이 "완고하여 사리에 어둡고 과묵·침착한 태도 

로 진술하면서도 타인에 누를 끼치는 것을 피하였다"라고 하여 의병장 

으로서의 선생의 의연한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선생은 1907년 7월 3일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다음날 내각회의에서 

종신유배형으로 감형되어 진도로 유배되었다. 12월에 융희황제의 특사 

로 석방된 후에도 뜻을 꺽지 않고 토지개간 계획을 세우는 등 나라를 

위해 힘쓰시다가 마침내 1917년 6월 26일 56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치 

셨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을 추서하였다. 

 

ㅇ 전시기간:2002. 06. 01 ∼ 06.30 

ㅇ 전시장소:독립기념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상설 전시실(제2∼3전시 

관 통로) 

ㅇ 전시내용 

 

1. 민종식 

2. 충남 청양군 정산면에 소재한 선생의 생가 

3. 안병찬 사진 및 통문 

안병찬은 1차 광수(光水) 봉기 때 의병대장인 선생의 휘하에서 군사마 

(軍司馬)를 지냈으며, 현재 그가 작성한 통문만 전함. 

4. 1차 봉기 때 격전지인 청양군 화성면 무한천 

5. 2차 봉기 지역인 지티고개 

6. 2차 봉기 점령지인 서천 관아터 

7. 2차 봉기 점령지인 보령군 남포관아 

8. 2차 봉기 점령지인 홍주성 

9. 홍산에서의 봉기 사실을 전하고 있는 기사({황성신문} 1906년 5월 

19일자) 

10. 장리석이 1975년에 그린 홍주성 수복 기록화 

11. 일본국립공문서관에 소장된 1906년 11월 30일자 민종식 선생 취 

조 내용. "완고하여 사리에 어둡고, 과묵·침착하며, 타인에 누를 끼 

치는 것을 피하였다"고 평하여 선생의 기개를 엿볼 수 있다. 

12. 평리원에서 1906년 12월 7일과 25일 두 차례 받은 심문조서 

13. 1907년 7월 2일 교수형을 선고받은 재판 판결문 

14. 민종식 교수형 선고 기사({대한매일신보} 7월 5일자) 

15. 민종식 친필 제문 

16. 홍성읍 대교리에 있는 홍주 의병의 유해를 안장한 의사총 

17. 청양군 정산면 천장리에 소재한 선생의 의병 유허비 

18. 독립기념관에 소재한 선생의 어록비 

(출처:독립기념관)) src="http://home.taegu.net/~pristy/midi/4-1.m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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