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02년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남상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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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서북구문화원 | 등록일 | 2002-07-31 | 조회 | 13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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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c="http://www.independence.or.kr/NEW/news/monthly/monthly_leade r_kr/phot/200208i.jpg"> 남상덕(南相悳 1881∼1907)
남상덕 선생은 1881년 경남 의령(宜寧)에서 남철희(南哲熙)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의 성장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말 대한제국 군대 에 보병 견습 참위로 입대하여 시위 제2연대 제1대대에서 근무하였 다. 선생이 참위로 근무하고 있을 무렵인 1907년은 격동의 시기였다. 광무황제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를 파견하여 전세계에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지 만, 일제는 이를 빌미로 7월 20일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다. 이 어 24일에는 [정미7조약]을 강요하였는데, 이에는 대한제국 군대를 해 산시키려는 비밀 각서가 삽입되었다. 이는 한국을 병합하려는 일제의 각본에 의한 것으로, 군대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저항을 사전에 없애려 는 의도였다. 드디어 융희황제는 1907년 7월 31일 일제의 강요에 의하 여 군대해산조칙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어 8월 1일에 각종 군령 기관 과 시위대를 위시로 진위보병 8개대대, 치중병 1개대대가 해산되었 다. 이러한 군대해산은 대한제국 군인들의 거센 반발을 가져왔다.
군대해산 당시 시위 제1연대 1대대장이었던 참령 박승환(朴昇煥)은 군 대해산에 분개하여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 을 다하지 못하면 만번 죽어도 애석하지 않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 하였다. 또한 중대장인 정위 오의선도 칼로 자결하였다. 이에 선생은 부하들에게 "위 장교가 나라를 위해 죽음으로 의로움을 보였는데, 내 가 어찌 홀로 살기를 바라겠는가? 마땅히 저 적들과 결사 항전하여 나 라의 원수를 갚자"라고 하며 시위대 봉기를 주도하였다. 시위대들은 탄약고를 접수한 뒤 무기를 가지고 병영 밖으로 나가 일본군들을 공 격하였다. 이에 시위대와 일본군 사이에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이미 일본군은 시위대의 저항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기 때문에 시내 곳곳에 군대를 배치하고 보병 13사단 51연대를 중심으로 진압 작전을 감행하였다. 특히 전투가 치열하였던 곳은 남대문 부근이었다. 남대 문 시가전에서 선생이 주동이 된 시위대 병사들은 러일전쟁에서 용맹 을 떨친 9중대장 가지하라(梶原)를 사살하는 등 전과를 세웠다. 하지 만 시위대는 중과부적으로 몰려드는 일본군을 감당하지 못하고 백병전 을 벌이게 되었다. 이 때 선생은 시위대 병사들과 함께 칼을 빼들고 대항하였지만 결국 일본군의 총탄을 맞아 27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날 시위대의 희생은 전사자 68명, 부상자 100명, 포로 516명에 달 하였다.
이와 같은 서울의 시위대 의거 소식은 지방의 진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원주 진위대가 특무정교 민긍호(閔肯鎬)의 주도로 8월 5일 봉 기에 들어간 것이다. 송상도의 {기려수필}에서는 당일의 서울 시가전 이후 "나머지 군인들은 각자 흩어져 정미(丁未)의 팔로(八路) 의병으 로서 다시 일어섰다"고 기록하였다. 이를 볼 때 선생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였던 시위대 병사들의 서울 시가전이 정미의병의 발화점이 되었 음을 알 수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ㅇ 전시기간:2002. 08. 01 ∼ 08.31
ㅇ 전시장소:독립기념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상설 전시실(제2∼3전시 관 통로)
ㅇ 전시내용
1. 군대해산 비밀각서가 삽입되어 있는 정미7조약 조약문
2. 대한제국 군대 사열식 광경
3. 대한제국 군인들이 즐겨 부른 군가
4. 대한제국 시위대 병사들의 훈련광경
5. 대한제국 시위대 병영
6. 대한제국 시위대 병사들
7. 해산 직전의 시위대 병사들
8. 박승환 자결 보도기사({황성신문} 1907년 8월 3일)
9. 시위대 봉기를 촉발한 박승환
10. 시위대와 일본군의 주요 격전장이 된 1900년대의 남대문 주변
11. 군대해산 이후 훈련원 주위를 경계중인 일본군
12. 강제해산 후 체포된 대한제국 군인들
13. 군대해산 항전 소식을 보도한 {대한매일신보} 기사 (1907년 8월 2일자)
14. 남상덕 선생의 봉기 주도 및 전사 사실을 전하고 있는 {매천 야록}
15. 남상덕 선생에 관한 기사를 싣고 있는 {기려수필}
16. 정미의병으로 발전한 원주 진위대 병영터 전경 및 화천 구 관아터(민긍호 격전지)
(자료출처:독립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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