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6월의 독립운동가 ▶민종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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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청양문화원 | 등록일 | 2002-06-11 | 조회 | 13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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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종식(閔宗植) 선생은 1861년(철종 12) 3월 경기 도 여주에서 아버지 민영상(閔泳商)과 어머니 기계 유씨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가문은 여흥 민씨로, 부친은 명성황후의 인척이 었다. 아버지는 이조·호조 등 여러 판서를 역임하는 등 광무황제의 신임을 받았다. 선생 역시 20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판을 역임하는 등 조 정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1895년 을미사변으로 국모가 시해되자, 선 생은 벼슬길을 과감하게 버리고 충청도 정산으로 낙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선생은 의병 봉기를 모의하였고, 의병장 에 추대되었다. 이에 1906년 3월 15일(음력 2월 21일) 광수장터(현재 의 예산군 광시면)에 600여 명의 의병이 모여 1차 봉기를 하였다. 선 생의 의병 부대는 청양군 화성면 합천 일대에 진을 쳤으나 3월 17일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패배하였다. 이후 선생은 재기를 노리다 5월 9일 홍산군 지티동에서 60여 명의 동 지와 함께 거사를 계획하였다. 2차 봉기에 나선 선생의 의병 부대는 5 월 13일 서천의 관아를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였다. 이어 남포읍성을 4 일 간의 치열한 공방 끝에 함락하여 위세를 떨쳤다. 드디어 1천여 명 에 달하는 선생의 의병부대는 5월 19일 일거에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홍주성을 점령하고 난 뒤 선생은 광무황제에게 상주문을 올려 을사오 적 및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처단과 의병을 일으킨 뜻을 받아 들일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홍주성이 대규모 병력을 파견한 일본군 에 의해 31일 새벽 4시 점령되어, 이 계획은 중지되었다. 이 때 학살 된 양민은 300여 명에 이르렀고, 체포된 의병 수도 145명에 달했다. 선생은 홍주성을 탈출한 뒤 재기를 노렸으나 11월 20일 공주에서 붙잡 히고 말았다. 선생은 체포된 뒤 서울로 압송되어 여러 차례 심문을 받 았으며, 주로 궁중과의 관련성에 관하여 집요한 추궁을 받았다. 이 때 심문한 일본 경찰이 "완고하여 사리에 어둡고 과묵·침착한 태도 로 진술하면서도 타인에 누를 끼치는 것을 피하였다"라고 하여 의병장 으로서의 선생의 의연한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선생은 1907년 7월 3일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다음날 내각회의에서 종신유배형으로 감형되어 진도로 유배되었다. 12월에 융희황제의 특사 로 석방된 후에도 뜻을 꺽지 않고 토지개간 계획을 세우는 등 나라를 위해 힘쓰시다가 마침내 1917년 6월 26일 56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치 셨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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