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려말의 학자 이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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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전체관리자 | 등록일 | 2001-11-22 | 조회 | 13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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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李穀)은 1298(충렬왕 24)∼1351(충정왕 3). 고려 말엽의
학자. 본관은 한산(韓山).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한 산출생. 한산이씨 시조인 윤경(允卿)의 6대손으로, 찬성사 자성 (自成)의 아들이며, 색(穡)의 아버지이다. 1317년(충숙왕 4)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한 뒤 예문관검열이 되 었다. 원나라에 들어가 1332년(충숙왕 복위 1) 정동성(征東省)향 시에 수석으로 선발되었으며, 다시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 하였는데, 이때 지은 대책(對策)을 독권관(讀卷官)이 보고 감탄 하였다.재상들의 건의로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이 되어 그때부터 원나라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1334년 본국으로부터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를 받고 귀국하 여 가선대부시전의부령직보문각(嘉善大夫試典儀副令直寶文閣)을 제수받았다. 이듬해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휘정원관구(徽政院管勾)·정동행중 서성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郎) 등의 벼슬을 역임 하였다. 그뒤 본국에서 밀직부사·지밀직사사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고 뒤에 한산군(韓山君)에 봉 해졌다.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 강목 編年綱目》을 증수하고 충렬·충선·충숙 3조(三朝)의 실록 을 편수하였으며, 한때는 시관이 되었으나 사정으로 선발하였다 는 탄핵을 받았다. 다시 원나라에 가서 중서성감창(中書省監倉) 으로 있다가 귀국하였으나, 충정왕이 즉위하자 공민왕의 옹립을 주장하였으므로 신변에 불안을 느껴 관동지방으로 주유(周遊)하 였다. 1350년(충정왕 2) 원나라로부터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 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郎中)을 제수받았고, 그 이듬해 죽었다. 그는 일찍이 원나라에서 문명을 떨쳤고 원나라의 조정에 고려로 부터 동녀를 징발하지 말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는 중소지주 출신의 신흥사대부로,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음으로써 고려에서의 관직생활도 순탄하였다. 그 는 유학의 이념으로써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대결하였으나, 쇠 망의 양상을 보인 고려 귀족정권에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는 못 하였다.이러한 상황은 그의 여러 편의 시에 잘 반영되어 있다. 《동문선》에는 100여편에 가까운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죽부인전 竹夫人傳〉은 가전체문학으로 대나무를 의인화하였 다. 그밖에 많은 시편들은 고려 말기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구체 적인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배 향되었다. 저서로는 《가정집》 4책 2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효(文孝)이 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