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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문신 이종학 게시판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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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려의 문신 이종학
작성자 전체관리자 등록일 2001-11-22 조회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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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학(李鍾學)은1361(공민왕 10)∼1392(태조 1). 고려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문(仲文), 호는 인재(麟齋). 곡(穀)
의 손자이며, 색(穡)의 둘째 아들이다.
1374년(공민왕 23)성균시에 합격하고, 1376년(우왕 2) 문과에 동
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장흥고사(長興庫使)에 제수되었다.
그뒤 관직이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에 이르렀다.
1388년 우대언(右代言)으로 요동정벌군이 출정하기 전 조병육정
신(助兵六丁神:군사를 陰助하는 6정신)에게 초례(醮禮)를 행하였
다. 창왕이 즉위한 직후에는 성균시를 관장하기도 하였으며, 곧
승진하여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었다.
1389년(창왕 1)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는데, 아버지 색이 정
권의 핵심에 있으면서 두 해에 걸쳐 과거를 관장하자 사람들의
시기를 받았다.
공양왕이 즉위하고, 색이 탄핵을 받게 되자, 더불어 폄출(貶黜)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彛)와 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부자가 모두 청주의 옥에 갇혔다가, 마침 홍수가 나서 사면되었
으나 다음해 다시 원지로 유배되었다.
그뒤 다시 소환되었으나, 1392년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된 뒤 이
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탄핵을 받아 함창으로 유배되었다.
이해 조선이 들어서면서 정도전(鄭道傳) 등이 손흥종(孫興宗)을
시켜 그를 살해하려고 하였는데, 자기의 문생인 김여지(金汝知)
가 판관으로 있어서 그의 비호를 받아 무사하였으나, 장사현(長
沙縣)으로 옮기는 도중 무촌역(茂村驛)에서 제찰사, 손흥종이 권
세있는 신하의 뜻에 뇌동되어 목을 메어 죽이니 당시 그는 32세
였다.
그는 죽음에 임하여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 명문으로써 모
든 사람들이 미워하는 바에 이르니 너희들은 과거에 응하지 말
라."하였다.
후에 한산의 문헌서원과 진천의 백원서원에서 배향되었으나 백원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 (고종 8)에 훼철되어 현재 복원계획 중이다.
저서로는 《인재유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