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조선시대의 문신 이산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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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전체관리자 | 등록일 | 2001-11-22 | 조회 | 10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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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보(李山甫)는 중종(中宗) 34년(1539)에 태어나서 선조(宣 祖) 27년(1590)에 별세한 문신이다.
자는 중거(仲擧)이고 호는 명곡(鳴谷)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목은의 7대손 이지부의 아들로서 숙보와 이지함에게 사사하고 명종(明宗) 22년(1567)에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선조1년(1568) 증 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벼슬길에 올라서는 해미 현감(海美縣監) 정언(正言)을 지내고 순안어사(巡按御史)로 북도 를 순찰하였고 수찬(修撰), 교리(校理), 지평(持平), 헌납(獻 納), 이조정랑(吏曹正郞) 들을 역임했다. 1577년에는 양모(養母)의 상을 당하고 서천에 내려 왔다가 다시 사인(舍人) 집의(執義), 사간(司諫), 응교(應敎), 직제학(直提 學) 등을 지내고 동인(東人) 탄핵을 박아 종부사정(宗簿寺正)에 좌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년 뒤 다시 집의(執義)로 전임하고 이어 동부승지 대사간, 우승지를 거쳐 1585년 부제학(副提學) 김 우옹이, 이이, 정철의 죄를 논하는 것을 반박했고 대사헌(大司 憲)에 특진되었으나 후에 이이, 박순, 정철의 공을 논하다가 사 간원의 탄핵을 받아 전직되었다. 경상도 관찰사 황해도 관찰사 를 지내고 선조(宣祖) 22년(1589) 기축옥사(己丑獄死)가 일어나 자 대사간으로 난국을 수습하고 이듬해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 라에 다녀와서 대사헌이 되었다. 선조 24년(1591)에는 황해도 관찰사로 있다가 건저문제(建儲問 題)로 정철 등 서인(西人)이 화를 입게 될 때 이에 연류되어 파 직되고 그는 고향에 내려갔었다. 이듬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고 이조참판에 오르고 이어 이조판서에 승진하여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을 맞아들였다. 이어서 북도와 삼남 의 도검찰사가 되어 나라 군량 조달을 하다가 좌참찬에 승진했 다. 호성공신(扈聖功臣) 2 등에 한흥부원군(韓興府院君)으로 추 봉 영의정 추증 보령의 화암서원 서천의 건암서원에 배향되고 시 호는 충간(忠簡)이다. 건암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의해 1871년 문헌서원과 함께 훼철되었으나 지금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