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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미 (洪 米) 게시판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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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홍 미 (洪 米)
작성자 서천문화원 등록일 2002-05-07 조회 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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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남양(南陽)으로 자는 자보(子普). 호는 과묵당(果默堂)이
다 선조 때 태어났다. 학문에 재주가 뛰어나고, 문장이 빠르게
성장했다.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는데,(부모님 병환에)
부지런히 탕약을 다려 드렸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드
렸으며, 부모의 상에는 슬퍼하며 예를 다하고 평생 치아를 드러
내 보이지 않았다. 밖으로 나아가지 않고, 죽림모옥(竹林茅屋)
에서 지내며 리(利)를 말하는 것을 사절(謝絶)하고 고향에서 지
내면서 글을 읊고 평생 모든 성현의 책을 공부하였다. 인종조
정묘년(1627)의 어려움 속에 호인(湖人)과 모의하여 의병을 일으
키고 공이 추대되어 도청(都廳)으로 가 군사를 모으다 왜적이 모
두 물러갔다고 하니 그만두었다. 계축년 문행으로 이름을 떨쳐
참봉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돌아왔다.
병자호란때, 본군 군수 이안진과 더불어 의병을 모았는데, 좌순
찰사 정세규(鄭世規)의 의성(義聲)을 들으니 일도(一道)와 조정
(朝庭)에 많았다. 공이 세번 대군사부(大君師傅)를 제수받고 모
두 취하지 않다가 대군이 북에 볼모로 끌려가서 또 사부의 벼슬
을 받았을 때 공의 나이 60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공을 걱정하
니 공이 말하기를 국가가 어렵고 위태로워 대군이 (나라)밖으로
내보내져 알지 못하는 나라에 있으니 비록 놁었지만 감히
어렵다
고 싫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심양으로 따라나가 어렵고 위태로운
것을 바르게 하겠다 하였다. [서행록(西行錄)]이 있다. 상이 아
름답게 여겨 말 한 필과 궤장을 내렸고, 삼가현감(三嘉縣監)을
제수하였다. 신정비가 있다. 숙종 정해년(1707) 열읍의 선비들
이 제사를 지냈으나 지금은 터가 남아있지 않다. 묘갈문을 대사
성(大司成) 권유(權愈)가 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