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여류시인 임벽당 의성김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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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서천문화원 | 등록일 | 2003-03-14 | 조회 | 8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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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생애 : 임벽당 김씨는 서기1492년(성종23년)에 태어나 서
기 1549년(명종4년)58세를 일기로 신사임당, 허난설헌과 더불어 조선조 중기에 3대 여성시인으로 살다 가신 자랑스런 이고장의 인물이다. 부여 중정리에서 김수천과 어머니 한양조씨의 장녀로 탄생하 여 할어버지 김축으로부터 시, 문, 서를 익혔고 이후에는 수예에 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한다. 서기1509년(중종4년)18세에 비인면 남당리의 유여주와 혼인하 여 아들 유위를 얻었다. 당시 시아버지 유기창은 중종반정때 유배지 거제도에서 풀려 나 병조참의 및 동지중추부사 등의 제수도 사양하고 비인면 남당 리에서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킴으로써 숙종조에 비인 청절사에 배향되었다 남편 유여주 또한 기묘사화가 터지자 남당리 도화동에서 우거 하면서 임벽당을 짓고 기묘의 의리를 지키면서 학인, 현인, 처 사, 의인 등으로 추앙받았으며 의성 김씨 또한 시, 문, 서, 수 에 정진하여 명원 임벽당 의성김씨로 명성을 더해갔다 이와같이 생존시에도 명원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사후에는 그 명성이 더욱 세상에 알려졌으니 서기 1683년(숙종9년)에 애산 김 두명이 중국사행을 다녀오면서 명나라의 목재 전겸익이 편집한 열조시집이란 책자를 가져오면서 더욱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 [열조시집]에는 임벽당 김씨의 시 3수가 수록되어 있었으 며 이를 본 조야에서는 그제야 명나라에까지 유명해진 임벽당 김 씨의 뛰어난 시재에 경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명인 재상들 이 다투어 서문과 발문을 찬하며 임벽당 유고가 높이 평해지고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요 영의정이였던 남구만의 서문도 오늘날 에 전해지고 있다 비인면 담당리에는 임벽당 내외분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세 그 루중 두 그루가 보호수로 남아 그 위용과 함께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하며, 이율곡 선생의 어머니인 신사임당과 유명한 홍길동 전의 저자인 허균의 누님인 허난설헌의 유명세에 비해 이분들과 옥석을 분별하기 어려우리 만큼 작풍과 작품을 남겼으면서도 500 여년을 그늘에 가려진 채 오늘에 이르렀으니 고르지 못한 세정 에 아쉬움을 느끼며 이제 늦게나마 이고장 후인들의 무심했음을 사죄드리면서 주옥같은 유시를 다음과 같이 감상해 보기로 한다. 1. 제 임벽당 1) 작은 골의 조용하고 깊숙한 이 한 구역은 벼슬을 버리고 산수를 즐기며 근심을 잊을만하다 인간의 시비와는 전혀 무관하니 꽃이 피면 봄을 알고 잎이 지면 가을인 줄 아네 2) 수풀에 의자한 집에 티끌 하나 없으니 다만 은자가 천성을 기르기에 알맞구나 한가히 베개 베고 쉼에 봄잠이 만족하니 하는 일 없음이 마치 태초의 백성 같도다 2. 증질자 (贈姪子) 육골이 뜬구름 같이 헤어졌는데 오늘 만날 줄 어이 알았으리오 멀리서 찾아오니 한없이 고맙구나 소식이지만 가난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