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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문화원] - 인물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이색
작성자 서천문화원 등록일 2003-07-15 조회 541
첨부  
 
이색(李穡 1328~1396) : 이곡의 아들로 자는 영숙이고 호는 목은
이다. 원나라 문종 천력원년 고려 충숙왕 15년 무진 5월에 태어
났다. 공은 총명하고 비상하여, 스스로 책을 읽을 줄 알았으며,
보는대로 외웠다. 겨우 14세에 성균시 십운과에 합격하였다. 원
순제고 정동시에서도 1등으로 합격했다. 다음해인 갑오년에 원나
라 제과제이갑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당시의 한림 승지인 구양현과 예부상서 왕사상이 함께 회시를 관
장하였는데, 공의대책이 원나라 제 2갑에 뽑혀 독권관 참지정사
두병이 등이 크게 칭찬하고 응봉한림 문자승사랑 동지제고 겸국
가정 이곡이 원나라에 있는 동안 이색은 조정 관리의 아들로써
국자감생원이 되어 3년 동안 재학하면서 중국연원의 학문을 깨닫
고 받아들였다. 학문을 힘써 닦아 크게 진보하여 더욱 성리학에
깊었다. 지정 신묘년에 이곡이 본국에서 죽자 이색은 원으로부
터 달려와 상을 마쳤다. 공민황초 복중에 상서를 올려 경계를 바
로잡고, 왜구를 막고, 문무를 가리고 학교를 숭상하고 이단을 막
는 것 등의 시사에 대해 논하였다. 이 색은 우간의 대부로 있으
면서 삼년상을 행할 것을 청하였다.
공민왕 16년 성균관 대사성을 겸하였고 숭문관 옛 터에 성균관
을 새로 짓고 당시의 경술에 정통한 인사를 뽑았다. 김구용, 정
몽주, 박상충, 박의 중, 이숭인 등이 모두 학관을 겸했다. 처음
에는 성균관생의 수십ㅇ 인에 불과했으나, 공이 학식을 새롭게
하고 매월 명륜당에 앉아 경서를 나누어 맡아 수업을 했다, 강의
가 끝난 뒤에는 서로 뜻에 의삼나는 것을 논란하여, 분석하고 판
단하고 절충함이 반드시 정자와 주자의 뜻에 맞도록 애썼다. 이
렇게 해서 우리 동방에 성리학이 크게 일어났다. 이로부터 학자
들이 사장을 외우는데 그치는 버릇을 고쳐 심성의 이치를 연구하
게 되고 공자의 도를 높이이단에 현혹되지 않게 되었으며 인의
를 숭상하고 공리를 꾀하지 않게 되어 유풍과 학술이 빛을 내어
새롭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공의 가르침에 힘입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