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신 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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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서천문화원 | 등록일 | 2003-07-15 | 조회 | 6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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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담(申湛) : 본관은 고령, 자는 충경, 호는 어성이다. 명종 임
자년(1552)에 급제하여 부제학을 지내고 사마문과에 급제하여 충 청감사, 이조참의를 역임했으며 부친이 이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신담은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천성이 효 성스럽고 우애가 있어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여막을 짓고 3년을 살면서 하루도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또한 동생이 심한 병으로 죽자 시체를 안고 슬프게 우니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대 여섯 살 때 이미 사서를 통달하였고 단정하고 강직하였다. 마을 에 오래된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가 울면 번번이 사람이 병으로 죽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두렵게 여겼는데 신담이 손수 그것을 불 살라 괴이함을 없앴다. 조정에 들어가서는 풍절이 늠름하였다. 그리고 소재 노수신 학봉 김성일 등 여러 인사와 더불어 을사년 원통함을 씻어 내리려 노력하여 귀양보냈던 사람들을 방면하게 하였다,. 본디 정여립의 사람됨을 싫어하여 서로 아는척하지 않 았고, 정여림이 부끄럽게 여겨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전주부윤 으로 부위하여 가는 길에 한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그 후 에 변을 일으키니 사람들이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삼윤 을 탄핵하여 미움이 더욱 깊어졌다. 마침내 모략에 빠져 관직에 서 밀려나게 되자, 산수에서 거닐고 노닐며 문장을 성취하는 것 을 스스로 기뻐하였다. 임진왜란 때, 나강 이임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키니 막하에 2천여 명이 충의로 몰려와 온양에서 왜군의 진격을 끊어 호서 우도를 방비했다. 조정에 들어가 임금에게 글을 올려 이전의 상태로 돌 아가는 계책을 힘써 아뢰었다. 묘가 본군 표동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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