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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문화원] - 인물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윤득실
작성자 온양문화원 등록일 2007-05-31 조회 506
첨부  
 

 

아산땅은 산수가 아름답기로 예로부터 이름난 고장이다. 동쪽으로는 천안에 인접하고, 남쪽으로는 신창과 온양에 접하여 있으며 서쪽은 음천에 이웃하고 북쪽은 평택에 맞닿아 있다.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이름난 산으로는 신성산, 동림산, 고영산, 연암산, 월량산 등이 동서남북으로 수많은 봉우리가 교차 대치되어 겹으로 둘러 쌓여있고 그 사이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으며 그 중간엔 평야가 길게 뻗쳐 있어 수목이 울창하며 기름진 묽은 들은 해마다 오곡이 무르익어 인심이 평안하고 살기 좋은 고장이다. 구한말 우리 나라는 남인이니 서인이니 하며 궁안에서 임금님을 사이에 두고 노론 소론하며 정사는 돌보지 않고 서로를 헐뜯고 자기들이야말로 충성스런 신하라 서로들 자처하며 당파 싸움에 여념이 없었던 때가 있었다. 그 때 당파 싸움이 한창일 무렵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했던 사람은 그 틈바구니에 낀 어진 선비들이었는데 그들 선비중에는 스스로 벼슬을 던지고 낙향하여 여생을 시골에서 보내는 이가 많았다. 이들 선비중에 한사람인 윤선비가 있었으니 벼슬이 의정부 공찬으로서 그 자리를 물러나와 아산 지방으로 낙향하여 무식한 행촌의 백성들을
계몽하면서 선한 일들만을 하며 백성들에게 착한 일만을 본받게하였다.
어느덧 그 고을 사람들은 하나, 둘, 윤선비의 가르침에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월은 기다림 없이 흘러가는 것 윤선비가 좋은때를 한번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윤선비가 죽은 후 윤씨집의 가세는 더욱 더 기울어져 갔다. 그러나 윤선비의 아들은 아버지의 교훈을 본받아 비록 가난하여도 의리와 도리를 다하여 착한 일만을 행했다. 어느날 윤씨는 이웃 마을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중은 중이로되 거지와 다름없이 몸은 움직이나 송장같은 걸인이 길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허허…. 뉘신데 이토록 고생을 하오?"
윤씨가 물었다.
"네 소승은 보시다시피 걸인 중놈인데, 몸은 늙은데다 병마저 들어 날은 추워 몸은 얼어붙고 기진맥진하여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하고 노승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거 참 딱하기도 하거니와 어찌 한담. 집이 너무도 누추해서…".
하며 그래도 길보다는 낫겠다며,
"우리집으로 가십시다."
하고 윤씨는 죽어가는 중을 집으로 데려와 몸을 닦아주고 옷을 갈아 입혀주고 약을 구해와 반갑지 않은 손님을 맞아 정성껏 간호를 해주었다. 삼동기간 정성껏 간호해 준 보람으로 중은 몸이 완쾌하게 되었다. 쌀쌀하게 불어 오던 찬바람도 걷히고 따스한 이른 봄날을 맞아 중은 윤씨와 작별을 고한다.
"소승의 몸도 완쾌되었고 또 날씨도 풀려 소승의 머무르던 곳으로 가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소승의 죽을 목숨이 이토록 살아 남아 있는 것도 모두 어지신 윤씨댁의 은덕입니다. 보시다시피 소승은 아무것도 없이 윤씨댁에 대하여 그 은혜를 갚은 길이라곤 없습니다.
다만 소승이 풍수법 지리학을 좀 터득한바 있어 윤씨댁의 묘지나 한자리 일러드리고 가겠습니다."
말하고 중은 동네 어귀를 빠져나와 산골짜기를 돌아 언덕받이를 오르기 시작했다. 중은 사면을 한번 돌아보고나서 윤씨를 바라보며 묘자리에 서서 그곳의 경치를 읊기 시작했다.
"동쪽으로는 비봉귀소형이요, 즉 봉이 날아가다 다시오는 형상이요. 남쪽으로는 금학포란형이요. 즉 학이 금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요. 서쪽으로는 비룡등철형이요. 즉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형상이요. 북쭉으로는 행주형이여. 즉 배가 떠나니는 형이요."
라고 말을 하니 윤씨가 그곳을 둘러 보고는 놀라며
"바로 이 산너머에 있는 산소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무덤이 아닙니까?"
하고 물으니 그는 그렇다고 하면서
"그 산소도 당초에는 이리로 옮긴 것입니다."
하고 말하고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도 덕수 이씨댁 산이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윤씨는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것이 소승이 명당자리를 잡는다고 내산도 아닌 남의 산에 자리를 일러 준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더욱이 덕수이씨 산이라며 장차 돈이 있다손 치더라도 자유로이 구입할 도리가 없는 땅이기 때문이었다. 윤씨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중은 다시 입을 열고는
"인간만사는 다 전생의 인연으로 정하여져 있으며, 모든 물건은 임자가 따로 있게 마련이요. 먼 옛날 윤씨댁 윗대 조상님과 충무공 사이에도 묘한 인연이 있었을 것이오. 지금의 당신댁이 몇 대를 두고 덕을 닦아 불쌍한 사람 도와주기를 내 혈육과 같이 하였으니 그 공덕인들 어찌 하늘이 무심하리
오."
하고는 그곳에 윤씨 아버님의 무덤을 옮기고는 이 고장을 잠시 떠나 살면 머지 않아 자연히 아버님의 분상을 모으게 될 것이니 그때는 중 자신도 윤씨도 이 세상을 떠나고 없을 것이라 했다. 그리고는 소승은 말을 계속 이어 나간다.
"이 자리가 바로 명당지로서 아산 땅에서는 손꼽을 자리지오. 저 사면을 바라보십시오. 무수한 산봉우리들이 마치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때 모양으로 동서남북에서 이 산을 멀리 혹은 가까이 감싸 주고 있지요."
그 중간을 불끈 솟은 산이 중심으로 힘차게 내려 뻗은 산줄기들의 형상을 설명한다. 그리고 묘자리를 따는 방법을 자세히 일러주었다. 노승의 말은 계속된다.
"윤씨댁 아드님이 아직은 어리나 장성만 하여 보면 반드시 고관 대작이 될 것입니다. 자손이 번성하여 재산으로도 갑부소리는 듣게 되지요. 단 한가지 흠이 있다면 몇몇 자손은 여의치 못할수도 있을 것이오. 그러나 부귀겸전 하는 이런 자리도 아산땅에서는 흔치 않은 명당자리지요."
라고 자세히 자리를 일러 주고는 노승은 염주를 굴리면서 발길을 옮기어 가고 있었다.
그곳에 묘를 옮긴 후, 그래서 그러한지, 과연 그 후로 윤선비 자손들은 위대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즉 학부대신 윤치호, 군부대신 윤웅렬, 윤영렬 등이 고관 대작을 지냈으며 근간에 있어서도 대통령 윤보선씨 대학총장 윤일선씨 장관 윤치영씨 등을 배출한 바 있다.
우리는 흔히 옛것을 하나의 미신으로 돌려 보리는 일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아직도 풍수지리학은 우리의 생활에서 쓰고 있음은 아마도 우리 선조들의 넋이 우리의 땅에 뿌리박고있음을 알려 주는 것 같다.
이 이야기는 하나의 일화에 지나지 않으나 윤씨 일가의 덕기를 말해주는 좋은 말이다. 남에게 은혜를 베풀면 은혜를 받는다. 불교에서의 인과응보다 현현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