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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1 게시판 상세보기

[온양문화원] - 인물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김옥균1
작성자 온양문화원 등록일 2007-06-01 조회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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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말엽에 태어난 비운의 혁명가 김옥균!
그는 폭풍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웠던 조국을 구하고자 개화 독립당을 위하여 민씨 정권과 피비린내 나는 투쟁을 벌이다가 아깝게도 젊은 나이에 조국도 아닌
머나먼 상하이에서 자객의 흉탄에 쓰러졌다.
그는 1851년 2월 23일 철종임금 2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김병태이며 어머니는 송씨였다.
우리는 그의 나라에 대한 애국심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총명함이 널리 퍼져 그 당시 세도가였던 김병기의 양자가 되었다.

김옥균에 대한 일화 하나를 들기로 하겠다.
그는 밤에만 글을 읽고 낮에는 자연을 벗삼아 돌아다니면서 수양을 쌓는데 정력을 다 쏟았다. 그래서 강릉에 살고 있는 양반 자제들이 놀기만 하는 부사의 아들이다 라는 비웃음을 받았다. 그러던 중에 강릉에 있는 오죽헌에서 옥균과 다른
양반이 결과 재능이 뛰어난 것을 알게 되자 부사의 아들이 나이는 어리지만 책을 많이 읽는 어른보다 뛰어난 것을 알게 되었다.
모두들 탄복하며 옥균의 시와 서화는 따를 사람이 없을 만큼 훌륭하다는 칭찬이 광동일대 선비사이에 퍼졌다.
김병기의 양자였던 그의 양부는 훌륭한 정치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깨우쳐 후에 가서 훌륭한 애국자가 됐다.

"이 세상에 뛰어난 천재로 태어나 가장 어려울 때를 만났는데
뛰어난 공적도 없이 슬픈 죽음만 남았으니, 옥균이여……"

1914년 충청남도 아산군 영인면 아산리 둔덕에 시체는 갈기갈기 찢기워지고 머리카락만 묻히던 날, 그의 친구 박영호는 추도사를 읽다가 그만 목이 메어 울어 버리는 것이었다.
나라를 구해야겠다고 개화를 부르짖던 옥균이 1884년 혁명에 실패하자 그의 아버지는 천안 감옥에서 사약을 마셔야 했고, 그의 어머니와 누이는 음독 자살을 하였으며 동생은 서울 감옥에서 옥사하고 아내는 옥천의 관비로 하천되어 고생하다 죽어야 했다.
세월이 바뀌어 새로운 문명이 조석으로 변할 때 우리 나라의 약함을 틈타 강한 나라들이 침략하려고 하는 것을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어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겠다며 개혁의 횃불을 들었던 김옥균과 그 동지들은 혁명에 실패하자 슬픈 종말을 맞이해야만 했다. 그는 혁명에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었다.
예의사상에 밝았던 우리 나라 선비들은 한 번 약속을 하면 몸을 바쳐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사나이의 도리라고 생각했을 때로서 김옥균도 일본 사람들을 우리 나라의 선비처럼 믿었던 것이 잘못이었다.우리 나라보다 개화된 일본이라 믿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원래가 섬나라 사람들은 도량이 좁고 간사하다는 말도 있듯이 그들은 처음부터 한국을 침략할 목적이었으므로 그까짓 정치가 한 사람과의 약속같은 건 잠꼬대 생각했었다.
약속만을 철석같이 믿었던 김옥균은 일본에 망명하고서도 그들의 힘을 빌어 우리 나라를 개화시키고 어느 나라도 침범하지 못하는 튼튼하고 건전한 나라를 만들어 보겠다고 호소도 해보고 분노도 해보았지만 그들은 아랑곳없이 이 나라를 하나씩 하나씩 침략의 손길로 삼켜버리고 말았다.
어리석은 이 나라의 정치가들은(민씨일가) 그를 죽여 없애 버리려고 계속 자객을 보내고, 그는 타국에서 쫒기는 몸으로 방랑을 해야만 했다. 일본에서도 여기저기로 읍리 표박생활릏 해야만 했고 끝내는 그들은 믿을 수 없이 중국 청나라에 도움을 청하러 건너 갔다가 끝내 이 나라에서 보낸 자객의(홍종우) 흉탄에 쓰러진 김옥균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속에 묻혀간 정치가였다.

그는 충청남도 공주군 정안면 광정에서 1851년에 태어났다.
물맑고 산수좋은 공주땅 산너머 천안군 광덕면에서 잠시 글을 읽었고 서울 북촌 화개동에 사는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의 친아버지는 가난한 선비였으나 그의 양아버지는 권세 좋은 조정의 중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서울로 올라오면서부터 새로운 글을 배우게 되고 여러 가지 새로운 학문을 습득하게 된다.
그는 열살 때 강원도 강릉부사로 부임하는 양아버지를 따라 강릉에 가서 그곳 송남서원에서 글을 읽으며 유명한 율곡선생의 유풍을 구경하기도 했다. 무엇을 보면 판단이 빠르고 예민했던 그는 열여섯살 때 서울로 돌아온다. 이때가 바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에 처음 쳐들온 온 해이다.
나라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세상 판단에 지나치게 고지식하다고 생각도 해왔다. 그는 서슬이 시퍼랬던 세도가 조대비의 친조카인 조성하의 어머니가 그의 아주머니였던 관계로 조대비와 인연을 맺게 되어 그로부터 귀족 사회에서 장래가 총망되는 젊은이로 각광을 받게 된다.
그는 스물두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문이 열렸고 관직에 있으면서 풍파 많은 조구의 실정을 차츰 알기 시작한다. 나라의 운명이 호롱불처럼 깜박거릴 때 그는 생각되어지는 것이 많았다.
첫째로 우리 나라는 힘이 약하에 때문에 강한 여러 나라가 넘겨다 본다는 것과 우리 나라도 힘이 강한 나라로 등장하려면 우선 백성을 깨우치는 교육과 정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거리에 나가면 하얀 바지저고리로 초라하기만한 백성들은 항시 세상의 변화도 모르고 산다는 숙명속에 어쩔수 없이 사는 것 같이 보였다. 남의 나라에 들어온 외국 군대들은 새로운 무기를 자랑하듯 대포를 끌고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마치 이 나라 백성을 어린양처럼 보고 고기를 넘나보듯 그들은 의기양양했다. 이런 광경을 바라보는 김옥균의 눈동자엔 항시 울분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이란 입신출세보다 백성들의 생활을 걱정하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 이 나라의 제도를 급속도로 개혁하여야 한다는 것이 이 나라가 튼튼해지고 잘 사는 나라가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이든지 더 보고알아야겠다고 책을 읽었고 일본을 다녀오기도 했다.
우리 나라 조정에서도 대감들은 여기저기로 분열되어 있었다.
청나라편 영국, 불란서, 미국, 일본편으로 갈피를 못잡고 외국 군대가 조금만 이상한 옷차림으로 변해도 놀래버리는 딱한 사정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라의 정사는 항시 구테의연한 상태였다. 조금만큼의 발전도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지금 이 나라는 어디선가 썩고 있다. 어디선가 곪아 가고 있다. 그러므로 필시 개혁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이 나라가 살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어디엘 가든 풍류적이고 새로워 보이기만 하는 그를 따르는 사람은 많았다. 그는 어찌되었던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