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메뉴 닫기
서브페이지 배경
충신 맹사성 게시판 상세보기

[온양문화원] - 인물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충신 맹사성
작성자 온양문화원 등록일 2007-06-01 조회 533
첨부 jpg m20070601132536.jpg

 

맹 사성은 고려말 전교부령을 역임한 맹희도의 아들로 공민왕 8년(1359년)에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신창(新昌), 호는 고불(古佛), 시호는 문정(文貞). 온양(溫陽) 출생이다.

우왕 12년(1386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 검열(檢閱)을 거쳐 전의승(典儀丞)·기거사인(起居舍人)·우헌납(右獻納) 등을 역임하였다.조선시대에 이르러 수원판관(水原判官)·내사사인(內史舍人)·예조정랑(禮曹正郞)·시어사(侍御史)·간의(諫議)를 지내고, 1400년(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었다. 1406년 이조참의·예문관제학을 거쳐 이듬해 진전사(進箋使) 시종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한성부윤이 되었다.

1408년 대사헌에 오르자 왕의 허락도 없이 부마 조대림(趙大臨)을 국문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 한주(韓州)로 유배되었으나, 영상 성석린(成石璘)의 변호로 풀려나 다시 기용되어 예조참판을 거쳐 1416년 판서(判書)로 승진, 호조(戶曹)·공조(工曹)를 거쳐 1419년(세종 1) 이조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다. 1425년 좌군도총제부판사(左軍都摠制府判事)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문신으로는 최초로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가 되고, 1427년 우의정에 올랐다.

1429년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이듬해 《태종실록(太宗實錄)》을 감수, 1431년 좌의정이 되고 다시 춘추관영사(春秋館領事)를 겸임,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찬진(撰進)하고 1435년 노령으로 사임, 세종 20년 (1438)에 돌아가시니, 세종대왕은 모든 국정을 중단하고 문무백관을 데리고 친히 임상하였으며 문정공의 시효를 내렸다.

황희(黃喜)와 함께 조선 전기의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했고, 성품이 청백 검소하여 남루한 행색으로 수령(守令)의 야유를 받았는데, 도망하던 수령이 관인(官印)을 못에 빠뜨려 후에 그 못을 인침연(印沈淵)이라 불렀다는 일화도 있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음률(音律)에도 밝아 향악(鄕樂)을 정리하고 악기도 만들었다. 또 청백리로 기록되고,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작품에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4수가 전한다. 맹사성의 고택인 행단이 아산군 배방면 중리에 사적 109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