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메뉴 닫기
서브페이지 배경
왜란종결자 이순신 장군 게시판 상세보기

[온양문화원] - 인물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왜란종결자 이순신 장군
작성자 온양문화원 등록일 2007-06-01 조회 660
첨부 jpg m20080312151058.jpg
이조 선조때의 명장으로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 본관은 덕수,
영중추부사 변의 후손으로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초계 변씨의 셋째 아들로 서울 건척동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용맹하여 전쟁놀이에는 항상 대장이 되었으며, 동네에 못마땅한 일이 생기면 그가 나서서 해결지음으로 동네 사람이 다 두려워 하였다. 장성하면서 그는 뜻을 무예에 두어 기사를 연습, 훌륭한 재능 연마하였다.
1576년 무과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 종사로 처음 관직에 나섰으며, 발포만호를 거쳐 1586년에 사복시주부가 되고 이어 조선 만호겸 녹도 둔전사의가 되었다.
이 때 이순신은 국방의 정화를 위하여 병력의 증강을 요구하였으나 절도사 이일에 의하여 부결되었으며 그 해 가을 적은 병력으로 호인이 침입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니 순신은 홀로 이를 맞아 싸워 포로 60여명을 잡아들였다. 이일은 피해의 책임을 순신에게 돌려 그를 옥에 가두고 사형에 처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무죄가 판명되어 해임으로 그쳤다. 그 후 전라도 순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 선전관 등이 되고, 185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 첨사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으로 만포첨사, 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 되던 해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 때 그는 전쟁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미리부터 군사를 훈련하고 장비를 갖추어 이에 대비하였으며, 특히 거북선을 만들어 전쟁에 임하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패장 원균의 요청을 받아 함대를 이끌고 적의 수군과 싸워 이를 도처에서 격파하였다. 즉 제1차는 옥포, 적진포에서 제2차는 사천, 당포, 율포에서, 제3차는 한산도 안골포에서, 제4차는 부산포에서 적선을 모조리 격파하여 대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한산도와 부산포의 싸움은 유명한 것으로 이로 인하여 일본군은 결정적 타격을 받고, 순신은 완전히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는 그의 위대한 지도력과 탁월한 전술로 인한 것이며, 조정에서는 위의 공으로 그에게 정현대부의 벼슬을 주고 최초로 수군통제사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순신의 공을 시기하는 원균 일파와 일본의 이간책으로 1559년 2월에
서울로 압송, 고문 끝에 사형을 받게 된 것을 판중추부사 정탁의 반대로 사형이 면제되어 4월 1일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된 원균은 안일과 방탕한 생활로 군비를 소모, 정유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과 대항하여 싸웠으나 대패하고 전사하니 수군은 전멸상태에 빠졌다. 사태의 긴급함을 느낀 조정에서는 다시 이순신을 통제사로 임명, 적을 막게 하였다. 이때 그는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으나 이를 돌볼 겨를도 없이 임지에 도착하니 남은 배는 겨우 12척뿐이고 군대의 사기는 완전히 저하되어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 적은 병력으로는 적을 대항하기 어렵다 하여 수군을 폐 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이순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허술히 보지 못할 것이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고, 다가오는 전투를 기다렸다. 이리하여 8월 15일 적의 대부분을 명량에서 대파하여 다시 제해권을 장악하고 명나라의 뇌물을 보내어 화의를 꾀하였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고 도요토미가 죽어 일본군이 철수하자 마지막 결전을 시도하여 11월 18일 노량에서 적을 섬멸하였다.

그러나 이 때 이순신도 적의 유탄을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치니 이 때에 그의 나이 54세였다.
유언에 따라 그의 죽음을 발표치 않고 끝까지 잘 싸워 막심한 손해를 입혔다. 순신은 그 지극한 효성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보아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며, 임진왜란 중 국가의 운명을 홀로 지탱한 민족적 은인이었으니 명나라 진인도 그를 칭찬하고, 또 그 죽음을 듣자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이 소식이 중앙에 알려지자 선조는 특사를 보내어 이를 조문, 시호를 내리고 선무일등공신의 호를 주어 덕풍군에 봉했으며, 우의정 및 좌의정을 추증하였다.
고향에는 충신문을 세우고 정조때에는 영의정을 추증, 임금이 친히 지은 비문을 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