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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의 역사 [선사시대~고려시대] 게시판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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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산의 역사 [선사시대~고려시대]
작성자 서산문화원 등록일 2022-03-17 조회 567
첨부 jpg 서산의 역사(1).jpg

선사시대

서산은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끼고 해안선이 발달하였고내륙에는 넓은 평야가 전개되어 선사시대 이래 사람들이 생활하기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구석기시대서산시 석남동 유적-밀개성연면 일람리 유적-격지·긁개음암면 도당리·대산읍 대로리 유적-격지·찌르개·찍개부터 신석기대산읍 웅도리-갈돌·갈판와 청동기시대해미면 휴암리-장방형·타원형 주거지의 유적과 유물이 출토되었다.

 

서산 지역에 정치적인 세력이 형성된 것은 삼한시대부터이다기원후 3세기 후반에 편찬된 삼국지(三國志)』 한조(韓條)에 마한(馬韓)에 54개 소국이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치리국국(致利鞠國)’을 27번째로 기록하고 있다. 치리국국은 백제시대의 지륙현즉 현재의 서산시 지곡면에 비정되었다. ‘치리국국은 마한연맹체의 일원으로 맹주국과 여러 형태의 결속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형성하였다.

 

고대

1) 백제

서산 지역은 3세기 말에서 4세기 중반 무렵 백제가 아산만 일대로 진출할 때부터 백제의 중앙과 일정한 관계를 형성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직접적으로 백제의 지방으로 편제된 것은 4세기 중후반인 근초고왕 때로 보인다서산 음암면 부장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백제 중앙으로부터 사여된 금동관모금동신발환두대도중국제 자기 등이 서산 지역의 토착세력이 백제왕의 권위를 바탕으로 지방을 통제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서산 지역이 일찍부터 백제 중앙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백제의 서남해안 진출의 중요한 거점일뿐만 아니라중국과 일본동남아로 진출할 수 있는 해상요충지이었기 때문이었다.

 

[부장리 고분군 5호 분구묘 출토유물]

 백제는 지방제도의 핵심으로 방군성제(方郡城制)를 실시하였고각 방성에 군성(郡城)과 현성(縣城)을 설치하여 지방 통치의 효율성을 도모하였다이에 따라 서산 지역에는 오방성(五方城가운데 서방성(西方城)의 치소(治所)를 설치하였다백제 시대의 서산 지역은 중국에서 유입된 선진문물을 가야산 협곡을 따라 충청도 내륙으로 전달하는 통로로 사용되었는데서산마애삼존불상과 보원사지 등이 조성되어 가야산 일대에 선진 불교문화가 꽃피게 었다.

[서산마애여래삼존상]

 

2)통일신라

통일신라 때인 757(경덕왕 16) 웅주(熊州)에 소속된 부성군(富城郡)과 그 속현(屬縣)인 지육현소태현(蘇泰縣백제의 省大兮縣현재 泰安), 그리고 혜성군(槥城郡)의 속현인 여읍현(餘邑縣백제의 餘村縣)으로 편제되었다신라말인 894(진성여왕 7)에는 당대의 최고 학자인 최치원(崔致遠, 857~?)이 부성군 태수(太守)로 부임하였는데이는 신라와 당의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이다당에 유학하여 중국 사정에 밝았던 최치원을 태수로 임명하여 신라말의 혼란 속에서 중국과의 교류에 비중을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서산 지역에는 부성현(富城縣)을 중심으로속현인 지곡현(地谷縣), 소태현정해현(貞海縣), 여미현(餘美縣), 고구현(高丘縣등이 설치되었다통일신라 때와 큰 틀은 같지만 부성군이 부성현으로지육현이 지곡현으로여읍현이 정해현과 여미현으로 바뀌었고처음으로 고구현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였다그리고 고려시대에는 서산 지역의 명칭이 승격또는 강등이 자주 일어났다. 1145(인종 23) 부성에 현령을 두었으나, 1182(명종 12) 고을의 호장(戶長)이 현령을 잡아 가두고 협박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관호(官戶)를 삭제 당하였다이후 1284(충렬왕 10) 서산 출신인 대호장 정인경이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전과를 올린 공으로 지서산군사(知瑞山郡事)로 승격되었고, 1308(충렬왕 34) 다시 서주목(瑞州牧)으로 승격되었다그러나 2년 뒤인 1310(충선왕 2) 모든 목()을 폐지함에 따라 서령부(瑞寧府)로 강등되었다가다시 지서주사(知瑞州事)로 격하되었다이러한 서산의 지명 변화는 지역 출신 인물들이 나라에 큰 공을 세우는가 하면 지역 주민들이 농민 항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의 결과이다이러한 변화에 따라 서산(瑞山)’, ‘서주(瑞州)’, ‘서령(瑞寧)’이라는 지역 명칭이 고려 후기부터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