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서산의 역사 [조선시대~현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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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서산문화원 | 등록일 | 2022-03-17 | 조회 | 6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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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선 시대에 이르러 서산 지역은 현재의 범위가 확정되었다. 조선 전기인 1407년(태종 7)에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합쳐서 해미현(海美縣)을 두었으며, 1413년(태종 13)에 지서주사(知瑞州事)를 서산군(瑞山郡)으로 고쳤다. 이후 1895년(고종 32)에 해미현을 해미군으로 승격했으나, 1914년 서산군과 합쳐지면서 서산과 해미 지역이 현재의 서산시와 태안군의 영역을 형성하게 되었다. 서산 지역은 가야산을 중심으로 바다의 물길이 깊숙이 만입하여 포구를 형상하고 있는 ‘안개’, 즉 내포 지역에 해당하였는데,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물산이 풍부하고 사람들의 인심이 좋아 충청 지역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서산 지역이 위치한 충청 지역은 조선 시대 호서사림의 근거지로 많은 사림(士林)들을 배출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서산에서는 많은 사족들과 주민들이 의병에 참가하였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10년 전 서산군수로 부임했던 고경명(高敬命)[1533~1592]은 1년이라는 짧은 기간을 서산 지역에서 활동하였으나 서산 향촌 사회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후 고경명의 격문이 서산 지역에 도착하자 서산 지역의 사족들은 의병을 일으켜 전쟁 혹은 군량미 조달 등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고,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고 향촌 활동을 통해 사족 지배 체제를 확립시켜 나갔다. 그 와중에 향촌 세력의 대두로 성씨들 간의 대립이 심화되자 혈연 중심의 문중이 결속력을 확보하거나 혈연적인 촌락을 중심으로 자기 방어를 모색하였다. 이에 족보의 편찬, 문중서원·사우의 건립과 같은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서산 지역에는 성암서원, 송곡사, 진충사, 부성사, 숭덕사 등이 건립되었는데, 국가의 사액을 받은 성암서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문중사우이다.
[성암서원] [숭덕사] 조선 말은 내부의 혼란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서구 열강의 이양선이 빈번히 출몰하고 통상의 요구가 한층 강화되었다. 1832년(순조 32) 영국의 무장 상선인 조드 암 허스트호는 7월 12일 서산 간월도 앞바다에 나타나 이민들에게 책을 나누어 주는 등 대화를 시도하였으나 서산·태안 지역 관리들의 거부로 물러났다. 조선 시대 서산 지역은 이전 시기에 비해 해양을 통한 외국과의 교류는 약화되었지만 바다와 육지가 공존하는 자연환경을 잘 이용하여 해양 문화와 내륙의 농경문화가 공존하는 독특한 문화적인 특성을 갖게 되었다. 근대 19세기 들어 서산 지역에는 천주교와 동학이 성행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피폐한 생활에 기인한 점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포 지역의 개방적인 주민성이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는 기폭제가 되었음은 두말할 것 없다. 중앙 정부에서는 반봉건적인 성향을 보이는 이들 종교를 억압하였고, 그 결과 1868년 병인박해 등으로 많은 천주교인들이 서산 해미읍성으로 끌려와 해미성지 등에서 처형을 당하였다.
현대 6·25 전쟁 이후 서산 주민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행정 구역도 약간의 변화를 겪어 1957년 대호지면·정미면이 당진면에 이속되고, 1973년에는 태안면이, 그리고 1980년에는 안면면이 읍으로 각각 승격되었다.
[1910년대 서산 지형도] [현재 서산 지형도] 2000년 이후 우리나라와 중국의 무역 규모가 크게 늘면서 본격적인 서해안 시대가 개막되었다. 그 결과 정부에서는 서해안고속국도를 건설하고, 본격적으로 중국 시장 공략을 위한 산업 단지를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서산 지역에도 많은 공장이 들어섰고, 대산항을 대규모 산업항으로 건설하였다. 이처럼 성장 동력을 마련한 서산 지역에는 매년 인구가 유입되어 증가 추세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