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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정충신(1576~1636) 글의 상세내용

『 충무공 정충신(1576~1636) 』글의 상세내용을 확인하는 표로 제목, 작성자, 등록일, 조회, 첨부, 내용으로 나뉘어 설명합니다.

제목 충무공 정충신(1576~1636)
작성자 서산문화원 등록일 2004-07-13 조회 1041
첨부  

어려서 전남 광주에서 살았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
율장군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는데 당시 행재소(임금이 피난하여
거처하던 곳)인 의주에 장계를 전달하고자 했으나 가고자 하는
사람이 없자 17세의 소년인 정충신이 자원하여 왜군의 사이를 뚫
고 외주까지 가서 장계를 전달한 의협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이 해 가을에 행재소에서 실시한 무과에 급제한 후 1623년 안주
목사로 방어사를 겸임하고 다음해 이괄의 난 때에는 도원수(都元
帥) 장만의 휘하에서 진부대장으로 이괄의 군사를 황주와 서울
의 안산에서 무찔러 진무공신 1등으로 금남군에 봉하여졌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부원수를 지냈고 1633년 조정에서 후금
에 대한 쇠폐를 거절하고 청과 절교할 것을 결정하여 이 사실을
청조에 알리려고 김대건을 사신으로 보내자 공은 김시향과 함께
탄식하며 사신을 머무르게 하고 조정에 재고할 것을 청하는 상소
를 올렸다가 당진으로 유배되었다. 그후 다시 장연으로 옮겨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곧 풀려서 이듬해 포도대장,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1636년 병이 심해져 운명했다.

2) 지곡과의 인연
이곳 대요리 일대는 당시 이괄의 땅이었던 것을 정부에서 환수
한 바 있었다.
정충신이 이괄의 난을 평정한 후 장만의 건의로 이 땅을 정충신
에게 주어 사패지지(賜牌之地)가 되었다.
말년에 병이 깊어지자 당진에 와 있었는데 대산 망일사에서 40
여 일 간 정양한 바 있고 이곳 국사봉을 돌아보고 자기가 죽거
든 이곳에 장사 지내라고 묘소를 지정해 놓았다. 이때 지정한 곳
이 현재의 묘소로서 진충사에서 위쪽 국사봉 아래에 있다.
따라서 지곡면과 특별한 인과 관계는 없고 이후 정충신의 자손
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여 현재까지도 금성 정씨 일
가가 계속 살고 있다.

3) 정충신장군 일화(逸話)
공은 장만을 따라 명나라에 여러 번 다녀왔고 광해군 9년(1617)
에는 일본에도 가서 국제정세도 살폈다. 또한 당시 만주지방에서
는 누루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우리 나라가 명나라와 통교함을 트
집잡아 침략하려는 야심을 보이자 조정에서는 후금의 동태를 살
피도록 당시 만포진 첨사인 공을 사신으로 보냈다.
누루하치도 공의 명성을 일찍이 들었겠지만 회담하는 자리에서
공의 기세를 꺾고자 좌우에 창검을 든 군사들을 세웠으며 장소
를 호화롭게 치장하였다.
청 태조는 “조선에는 인물이 없어 너 같은 소소인(小小人)을
보내서 국사를 논하게 했느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공은 껄껄 웃으며 “우리 나라는 사람을 쓰는 법도가 따로 있어
서 예의 도덕을 잘 지키는 나라에는 대대인(大大人)을 보내지만
포악하고 힘만 주장하는 나라에는 소소인을 보낸다. 그대는 소장
부를 잘 알아보는구려. 그런데 나 같은 소장부가 무엇이 무서워
이처럼 창검의 숲을 세우고 맞이하시오.”하니 태조가 더 할 말
을 잃었다.
청태종이 네 아들을 불러 공께 인사를 시키니 공은 넷째 아들
차례가 되자 일어나서 맞절을 하는 것이었다. 태종이 물으니 진
시황이 다시 태어났기로 그런 것이라 했다. 과연 후일에 중국을
통일하는 천태종이 되었다. 그후 정충신이 있는 동안 청나라는
침범해 오지 않았다. 이외에도 주체성 있는 외교 활동으로 국위
를 선양하고 국난을 타개한 위대한 전략가요, 외교관이요, 정치
가였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려고 하자 이항복이 불가함을 아
뢰자 북청으로 귀양을 보낸다. 스승이었던 이항복을 모시고 북청
까지 동행하여 이항복이 그곳에서 죽으니 시체를 염습하여 모시
고 고향인 포천에 장사 지내고 3년간 심상(心喪)하였다. 그만큼
의리가 강한 장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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