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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경(鄭仁卿) 글의 상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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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인경(鄭仁卿)
작성자 서산문화원 등록일 2006-04-27 조회 795
첨부

 

정인경(1241-1305)의 호는 간월재(看月齋)이고 시호는 야열(襄烈)이다. 아버지는 정신보(鄭臣保)로서 중국의 송나라 원외랑이었으나 원나라의 태조가 중국을 통일하자 1237년에 간월도에 와서 살게 되었다.
1256년 원나라에서 우리나라에 처들어와 예산 신창에 주둔하자 이를 야습하여 물리쳐 공을 세우고 제교가 되었다. 이해 6월에는 직산일대에 주둔한 몽고군이 아산 일대에 침입함으로 역시 야습하여 격파했다.
1264년 24세 때에 앞산 봉우리에 망운대를 짓고 연못을 만들어 이를 보고 즐기며 자수(自修)하였다.
1269년 충열왕이 원나라에 갈 때 섭교위(攝校尉)로 수행했으며 돌아오는 길에 파사부에 이르러 임연(林衍)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원나라에 되돌아가도록 하여 사후 수습하는데 공을 세웠다.
충열왕이 즉위하면서 시종일등공신으로 책봉하고 부성현을 높여서 서주군으로 승격시켰다.
본래 서산은 1145년 부성 현이었으나 1182년 주민의 반란으로 현을 혁파하고 운주에 복속시키니 이후 고을은 황폐하고 백성은 흩어졌다.
공이 관호를 받은 후 왕께 상소하여 복군케 한 것이다.
25년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고 도첨의 찬성사를 거처 중찬(영의정 격)으로 승진 되었다.
65세에 작고하니 왕이 양열이라 시호를 내렸다. 성품이 근엄하고 굳으며 설인(외교관)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니 이르는 곳마다 칭송이 자자했다.
서산 인지면 송곡사에 부친 정신보와 함께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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