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기 : 정월 보름에서 2월 초하루까지
● 신격과 위치 : 볏가리대 이외에 화적봉(경도잡지, 동국
세시기) 혹은 노적가리라고도 한다. 따라서 신체는 벼의 모양
혹은 노적가리 모양을 만든 것이라 생각된다. 꼭대기 순이 남
아 있는 소나무를 마당 한가운데 세 가닥의 동아줄로 세웠다.
세 가닥 새끼줄은 짚밑동을 리본처럼 나오게 꼬아서 ''벼이삭 형
용''처럼 만들었다. 볏가리대가 하나의 벼이삭의 형용이라면 꼭
대기에 오곡 종다리기를 벼이삭처럼 달아 놓고 다음 벼대공처럼
치마받이 를 하고 세 줄을 늘였던 것이다. 노적가리도 역시 볏
가리를 쌓아 놓은 형용이라 할 수 있다.
위에는 치마받이로 좁고 아래는 세 가닥으로 넓게 자리를 잡
기 때문이다. 볏가리는 ''세운다''고하고 ''자빠뜨린다''고하
는 용어를 사용한다. 위치는 대동샘 옆이나 부자집 마당, 또는
마을의 공동의 들마당이었고 마을에 한 개, 또는 둘, 셋을 세우
기도 했다.
이 볏가리제는 ''서산볏가릿대놀이'' 로 제 26회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바 있다.(김현구 서산
문화원장 구성 출연)
● 참가 인원과 제관 : 마을 사람이 모두 참여한 가운데 제
관 3~5명이 집전을 하게 된다.
● 제수와 제의 구성 : 제수는 대추, 밤, 곶감, 사과, 배,
시루떡, 포(복어), 술 등이다. 제의는 볏가리를 세울 때와 자빠
뜨릴 때에 시행된다. 서산볏가리대놀이의 구성은 (1)입장 (2)지
신밟기 (3)볏가리대 세우기 (4)화간제 (5)농사놀이 (6)볏가리대
눕히기 등 여섯 과정으로 이루어졌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
과 같다.
(1) 입장 - 볏가릿대 농악과 함께 농기, 제관, 제물을 인 아낙
네, 섬을 진 농부, 작도, 쟁기, 써래를 진 사람, 주민들 순으로
흥겹게 춤을 추면서 입장한다.
(2) 지신밟기 - 음력 정월 열나흗날 저녁, 농기를 앞세우고 대
동샘을 둘러싼 후 상쇠의 선 소리로 ''물 주시오 물 주시오 용왕
님네 물 주시오 뚫어라 물구멍만 뚫어라'' 하면서 샘굿을 한
다. 샘굿이 끝나면 집 마당으로 가서 연중 무사하기를 비는 지
신밟기를 한 다음, 마을 곳곳에서는 1년 간의 액운을 몰아내는
모닥불을 피운다.
(3) 볏가릿대 세우기 - 마을 주민들은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
가 위에는 벼, 보리, 조, 팥, 기장 등 오곡을 달아매고 벼이삭
이 늘어진 모양으로 동아줄을 거꾸로 틀어 줄을 늘여 대동샘 옆
에 볏가릿대를 세우고, 나무메를 든 주민들은 자기 땅을 넓히기
위해 ''여기도 내 땅, 저기도 내 땅''하며 마당찧기를 한다.
(4) 화간제 - 2월 초하루가 되면 볏가릿대 앞에 제상을 차려
놓고 제를 올린다. 영좌가 샘을 퍼서 세수를 한 다음, ''전지전
능하신 신령님께 비나이다. 입은 덕도 많지마는 금년에도 우리
조선 삼천리 팔도강산에 삼재를 물리치고, 풍년이 들게 하시고
온 백성들이 부귀등명하며 자손마다 안과 태평하게 하여 주시기
두 손 모아 비나이다'' 하고 비손을 하면 주민들은 모두 함께
두 번 절한다.
그런 다음 집사가 제물을 바가지에 담아 ''동서남북 오고 가
는 잡귀잡신 다들 먹고 물러가라 고수레! 고수레'' 하며 잡귀신
을 몰아내면 주민들은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이때 어디선가 난쟁이가 나타나 들어오면 짤랑벼가 생겨 흉년
이 든다 하며 쫓아내고, 키 큰 사람이 들어오면 벼가 키도 크고
대풍이 든다 하여 기뻐하며 후대한다.
(5) 볏가리대 눕히기 - 한마당 놀이가 끝날 무렵, 마을 사람
들은 상사디야를 부르며 볏사릿대를 눕힌다. 이때 영좌가 볏가
릿대에 매달았던 오곡을 풀어 싹튼 상황을 살펴보고,
''오곡이 모두 싹이 잘 트였으니 올해는 풍년이 들겠네! / 벼
만석이요! / 보리 오천석이요! / 조 삼천석이요! / 팥 이천석이
요! / 기장 일천석이요!'' 하며 주민들은 모두 풍년을 맞이하
는 기쁜 함성을 지른다. 그리고 뉜 볏가릿대줄은 작도로 썰어
오곡과 함께 섬에 담아 집으로 향한다.
● 제비 및 제후 상황 : 인지 야당리에 현재 볏가리제는 소
실되었고 당시 경비는 서산시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 유래 : 언제부터 인지 야당리에 볏가리제가 기원했는지
는 알 수 없으나 <동국세시기>나 <경도잡지>에 볏가리가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200년은 넘은 것 같다. 풍농을 기원
하는 제인데 농업이 쇠잔해짐에 따라 그 역기가 시들해진 것이
라 하겠다. 이를 보전하기 위해 김현구 서산문화원장 등이 애
를 쓰고 있다.
한서대학교에서 이 볏사리제를 시연하도록 하는 것도 그 일환
이 아닐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