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팔봉면 대황리(大黃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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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서산문화원 | 등록일 | 2002-05-30 | 조회 | 1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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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황리(大黃里)는 조선조(朝鮮朝)때까지는 대동리(大同里)와 지 파동리(地把洞里)로 되어 있었던 것을 구한말 1895년에는 대동리 (大同里) 황곡리(黃谷里)로 구분되고 1914년 일제 강점기의 행정 구역 개편때에 대동리(大同里) 황곡리(黃谷里)가 합해지고 방길 리(方吉里) 일부를 떼어 붙여져서 대황리(大黃里)가 되었다. 대황리는 북쪽에 서산지방에서는 명산으로 꼽는 해발234m의 연 화산(蓮花山)을 두고 남서로 펼쳐진 마을이다. 자연마을로 대표 적인 지명으로는 황골(黃谷)이 제일 유명하다. 그러나 왜 황골 (黃谷)이라 했는지 그 의미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마을은 고산심곡(高山深谷) 지대로서 으름, 머루, 다래덩굴과 함께 온 갖 관목류의 나무들이 늘 빽빽이 들어차 있어서 가을이면 붉게 단풍이 들어 가히 절경을 이루었으므로 이에서 연유 황골(黃谷) 이라 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되는 것이다. 황골(黃谷)과 지곡면 연화리 미력벌(彌坪) 사이는 약 120m 높 이의 그심이재(文智古介)가 있다. 옛날 조선조때는 같은 문현면 1)(文峴面)이었으니 옛 문지촌(文智村)이란 이름은 이제는 두 개 면 두 개마을로 나뉘었지만 이 두마을 모두를 뜻하는 것이었는 지 모르겠다. 조선 선조때 대과급제하고 참판의 지위에 까지 올랐으나 왕이 의주(義州)로 몽진했을 때 호종(扈從)했다가 어머님을 위해 돌아 와 사경(死境)을 헤매는 어머님에 대한 효도를 다했다는 청조(聽 潮) 조존세(趙存世)가 이곳에 살며 주옥같은 시문(詩文)을 남겼 음은 호산록(湖山錄)에서 잘 전해지고 있다. 최근세지만 구한말 에서 일제 강점기와 광복후까지 이곳에서 출생하여 바깥 출입없 이 일생을 살다간 "신동유"라는 분은 일제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상투에 망건과 갓을 쓰고 한복으로 생을 마쳤을뿐 아니라 자식들 은 물론이요 그의 아우들과 조카들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하였으 며 행의(行誼)가 얼마나 진솔하고 바르게 하였던지 인근에 신학 자(申學者)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심이재2) 즉 문지고개(文智古介)에는 서산시 관내에서는 제 일 잘 보존된 서낭당(城隍壇)이 남아있다. 이런저런 학맥(學 )과 학통(學統)이 있음인가 초등학교만 졸 업하고도 두 번이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훌륭한 의정 활동을 하였으며 지조를 지켜 존경을 받았던 안만복(安萬福)도 이곳 출 신이다. 대황리(大黃里)에는 황골(黃谷), 벌말(坪洞), 그학이(居鶴), 작은말(小村)등 자연부락이 있고 그외에 가장골, 고잔말, 당산말 (堂山 村), 방천주막(防川酒幕), 백여울(白灘), 백여마을(白灘 洞), 국사봉(國賜峯), 작은골(小谷), 신발뿌리, 도당골(都堂 谷), 절골(寺谷), 옻샘(漆井), 여수바위(狐岩)등의 지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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