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팔봉면 금학리(金鶴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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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서산문화원 | 등록일 | 2002-05-30 | 조회 | 10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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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학리(金鶴里)라는 마을이름처럼 좋은 이름도 흔치 않다. 학 (鶴)은 옛부터 극히 상서로운 새로 알려져 왔다. 장생불사(長生 不死)한다는 10장생(十長生)인 해(日), 산(山), 물(水), 돌 (石), 구름(雲), 솔(松), 불로초(不老草), 거북(龜), 학(鶴), 사 슴(鹿)등 열가지 중의 하나로 우리의 조상들은 병풍등에 그려서 방에 치고 감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학(鶴) 중에서도 금(金) 으로 된 학(鶴)이라면 얼마나 귀하고 좋은 학(鶴)인가. 이런 금학리(金鶴里)란 이름을 갖고 사는 이 지역 사람들이야 말로 선택받은 주민들임에 틀림이 없고 이 마을에는 세세년년 영 원토록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금학리(金鶴里)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의 행 정구역 개편 때에 생긴 지명이고 조선조 때는 서산군 노지면(瑞 山郡 蘆旨面) 금곡리(金谷里)1)와 마전리(麻田里)로 있었던 것 을 구한말( 韓末)인 1895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노지면(蘆旨面) 소속으로 바뀌면서 영풍창면(永豊倉面)2) 금곡리(金谷里) 마전리 (麻田里) 소길리(小吉里) 로 되었었다. 그후 1914년 개편 때에는 영풍창면(永豊倉面)과 문현면(文峴 面)이 합쳐져서 면내 중심에 우뚝솟은 팔봉산(八峯山) 이름을 따 서 면명(面名)으로 할 때 금곡리(金谷里) 마전리(麻田里) 소길리 (小吉里) 그리고 문현면 우길리(文峴面 牛吉里) 일부를 합쳐 금 학리(金鶴里)라 하였는데 이때 이름은 금곡리(金谷里)에서 금 (金)자와 마을내 자연부락명인 추학(秋鶴)에서 학(鶴)자를 따서 금학리(金鶴里)라 한 것이다. 금학리는 남쪽으로는 서각산(犀角山 일명 장군산(將軍山), 금 강산(金剛山 316m)이 있고 남동편으로 비룡산(飛龍山 240m), 북 으로 연화산(蓮花山 234m)등 높은산으로 둘러쌓인 분지형(盆地 形) 마을로 서북편으로 뻗어 내린 심산유곡(深山幽谷) 마을로 비 교적 오염되지 않은 마을이다. 금학리라면 뭐니뭐니 해도 서산지방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이 비 교적 일찍이 이곳에 정착한 마을이고 천주교회(天主敎會)가 가장 먼저이곳에 섰던 것으로 유명하다. 1917년 서산지구 초대신부로 부임한 안학만 루가 신부가 본당 을 팔봉면 금학리 118번지에 세우고 2년여간 예배를 보다가 1919 년 음암면 상홍리로 옮기였던 것이다. 그 자리는 빈터로 남아 있지만 그 아랫마을 소길리에는 현재 도 공소가 세워져있고 이 지역에는 많은 조상전래로 믿어오는 천 주교 신자들이 믿음을 지키는 마을로 이 마을에서 신부, 수녀의 배출이 서산의 어느 지역보다 많은 곳이다. 이 마을은 충적세(沖積世) 때 충적층(沖積層)으로 이루어진 분 지(盆地)여서일까 비교적 평탄한 마을임에도 논(畓)보다는 밭이 많지만 비옥하여 일찍부터 삼(麻)과 약초재배 등이 발달하였던 관계로 농촌치고는 생활수준이 높다. 집성(集姓)으로는 경주최씨(慶州崔氏)로 60여호가 넘는다. 같 은 최씨가지만 금곡(金谷) 최씨(崔氏) 셋굴 최씨(崔氏)로 나뉜 다. 이외 2대째 세거해오는 의령남씨(南氏)가 산이벌에 살고 그 밖에 창녕조씨(昌寧曺氏) 20여호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왔는데 이들은 주로 소길리(小吉里)와 우길리(牛吉里)지역에 사는데 대 대로 천주교 신자들이다. 금학리는 앞으로 마을이름처럼 환경문 제의 중요도가 높아지는 때에 보다 살기좋은 곳으로 각광받는 시대가 올 것이라 믿는다. 금학리에는 ①금곡(金谷) ②마전(麻田) ③윗삼거리(上三巨里) ④산이벌(山坪) ⑤아래삼거리(下三巨里) ⑥추학(秋鶴) ⑦쇠골 ⑧ 소길(小吉里) ⑨우길(牛吉) ⑩도당미(道塘山) ⑪쥐뿌리재(鼠角 峙) ⑫산이고개(山峴) ⑬시랭이들 등의 자연마을과 지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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