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지면 애정리(艾井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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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서산문화원 | 등록일 | 2002-05-30 | 조회 | 1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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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리(艾井里)란 이름은 원래 무학대사(無學大師)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조선조때까지는 애당리(艾堂里)였던 것이 1895년의 구 한말 행정구역 개편때에 애당리(艾堂里) 언정리(彦井里)로 나뉘 었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때에 다시 한마을로 합 쳐지면서 애당리(艾堂里)에서 애(艾)자를 따고 언정리(彦井里)에 서 정(井)자를 따서 애정리(艾井里)라 한 것이다. 애당리(艾堂里)의 속칭은 쑥댕이라 부르는데 애(艾)자는 쑥풀 애 자로 애당(艾堂)이란 한문 표기로 바꾼 것 뿐이다. 현재의 행 정구역은 애정리1구 구역이다.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이곳에서 태어난 곳이기 때문에 조선조 초 기쯤에는 이곳에 그를 위하는 사당을 세웠던 모양이나 현재는 흔 적조차 없고 1989년 12월에 서산군수 박융화가 세운 무학대사 기 념비(無學大師 記念碑)가 있는데 그 비에 기록된 비문(碑文)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무학의 아버지는 간월도리에서 살았었는데 가난하여 갈대로 삿 갓1)을 만들어 서산장에다 내다 팔아서 연명하고 살았었다. 그런 데 우연히 부상 당한 상처의 악화로 관가에서 빌려다 쓴 500량 을 기한내에 갚지 못하는 일이 생겼었다. 관아에서는 사령(使令)2)을 시켜 무학의 아버지를 데려 오도록 하였으나, 그가 마침 집에 없자 대신 부인인 무학의 어머니 채씨 (蔡氏)를 데려 오게 되었다. 무학(無學)의 어머니가 사령들에 끌리어 이 지방을 지나던중 갑 자기 산기가 있어 길가에서 아기를 낳으니 이날이 1327년 9월 20 일로 이가 곧 무학(無學)이다. 사령들은 지엄한 수령의 지시의 이행을 위하여 아이를 부근에 쑥을 뽑아 덮어 놓게 하고 산모를 이끌고 관아에 도착하여 그 상 황을 수령에게 알리니 수령은 황급히 채씨 부인을 돌려 보내어 아이를 살피도록 하였다. 채씨 부인이 되돌아와보니 아기는 웬 학(鶴)이 날아와서 고이 품고 있다가 무학의 어머니가 가까이가니 날아가 저편 남쪽 마 을 모월리와 산동리 경계지점에 있는 마을을 한바퀴 비행해서 돌 은 후 바위에 앉았다가 날아 가더라는 것이었다. 이후부터 이곳을 쑥댕이라는 이름이 생기고 무학이란 이름도 당 초에는 학이 춤추며 날아 갔다하여 무학(舞鶴)3)이라 이름 지었 었는데 후에 무학(無學)4)으로 고쳤다”는 내용이다. 이 비문(碑文)은 이양(李良)이란 분이 찬한 비문을 근거로 문학 박사 이종익(李鍾益)이 지었다고 되어있는데 모월리(毛越里)를 모월리(暮月里)로 기록한 것은 무엇인가 근거하여 기록한 것이겠 지만 늦은 해, 늦은 저녁이라는 말은 있어도 지는 달로 쓰는 것 이 상식인데 시(詩)적 감각에서 지어낸 지명일까, 앞뒤가 안맞 는 이름인 것 같다. 이 마을에서 사는 유한동(柳漢東)이 구연(口演)한 전설은 다음 과 같다. “옛날 무학의 오메는 간월도에서 살면서 그곳에서 나는 갯갓5) 을 헤다가 스산장이다 팔어서 먹구살었는디 워느날은 그이(蟹) 를 잡어가지구서래미 스산장으루 팔러 갔었드리야. 그런디 이 쑥 댕이를 지날라구 허는디 금방 배가 아프면서 아이를 낳게 됐드리 야. 그런디 워떻게 허겄어. 그이를 장에 갔다 팔아야 살겠으닝 께 낳은 아이는 헐 수 없이 길가에다 놓구서는 쑥을 뽑아서 덮 어 놓구서는 그 길로 그이(蟹)를 팔러 스산장으로 갔었드랴. 그 때는 그말이어 여러가지로 어려웠으닝께 포대기가 있었겠어. 땅 바닥에 깔아놓을 비닐이나 종이가 있었겄어. 그냥 내버리고 간게 나 마찬가지지. 무학이 오메가 서산장을 댕겨오너 보니께 죽은줄 로만 알았던 애기는 웬 하얀학이 품어 안고 있었다가 사람이 가 니께 학은 날아서 건너편 모월리편으로 날아가다가 한바퀴 빙 돌 더니 저멀리 날아 가더리아야. 그 후루다가 이곳은 쑥댕이라 허 구 모월리와 산동리 경계가 되는 곳은 학돌재라 했다는 기여. 무 학이라는 이름도 학이 춤추며 날아갔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는 기여. 이상이 다여.” 옛 언정리(彦井里)였던 곳은 현 애정리2구 마을이다. 언정리(彦 井里)란 애정리 2구 들가운데 물이 잘 나는 샘이 있었는데 이 샘 하나로 4∼5,000평이 넘는 넓은 면적의 논 에수리를 안전하 게 관개 할 만큼 많은 샘물이 용출 하였기에 큰 샘(彦井)이란 의 미의 이름 붙여졌고 이 샘(井) 이름이 마을 이름으로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샘도 최근 경지정리로 모두 흔적조차 없어졌다. 애정 리에는 관청터(官衙址) 새말(新村) 왯골(外谷) 두우사(杜宇寺) 읍바위(泣岩) 정문골(旌閭谷) 장자터(長子址) 사장터(射場址) 중 간말(中間村) 서원말(書院村) 등기산(嶝起山) 매봉재( 峯峙) 등 의 자연 마을과 지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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