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석남동 -남원(南院)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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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서산문화원 | 등록일 | 2004-07-13 | 조회 | 7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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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南院)부락은 석남동 2통 마을이다. 이 곳 사람들은 남원(南 院)을 “남한”이라고 부르고 남한이라는 마을이름이 잘못 불려 지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남원이란 옛날 원(院) 제도에서 유래되는 것으로 고려와 조선 조 때에는 역 역(驛) : 역이라 함은 나라에서 관원들이 지방 출 장시 숙박할 수 있고 타고 다니는 말과 마부, 짐을 옮길 수 있 는 역원 등을 두어 교통편의를 제공하던 곳, 역졸은 암행어사에 게는 어사의 업무를 돕는 포졸의 역할도 수행하였음. 과 역 사이에 두었던 관원을 위한 국역의 여관이었다. 그 유지비 로 고려 34대 공양왕 때 (1389~1392)에는 원위전(院位田)을 주 었으나 불비한 점이 많았다하고 조선조에 와서 어느 정도 정비되 었는데 세종 27년(1445)에는 그 지방 사람으로 원주(院主)를 삼 아 이를 관리케 하였는데 경국대전에 의하면 원주(원을 운영하 는 사람, 국영여관 운영권자이다)에게는 대로(大路)를 관리하는 데에는 지금 어느 곳이 원(院)터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남원 마을이 옛날에는 교통의 요충지였음에 틀림이 없고 옛날 역(驛) 이었던 인지면 풍전리와 해미면 동암리와는 중간위치에 있어 원 으로 적당한 위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옛날 원의 명칭이 오늘날 행정구역의 명칭으로 남은 예로는 경기도 이천군 “장호원읍” 을 들 수 있고 지금까지 원명칭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곳으로 는 예산읍 “신례원역” 충북 진천군 만승면 광혜원리가 있다. 충남도지(1939 발행)에 의하면 서산군에도 냉정원(冷井院), 저지 원(猪旨院), 망현원(芒峴院) 등이 있는데 지금은 그 곳이 어느 곳이지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전국지리지(全國地理志)에 의하면 냉정원은 재군남 15리 요. 저지원은 재군남 5리라 하였는바 거리를 재어보니 남원부락 까지가 약 2km로 남원의 명칭이 저지원이 아닌가 생각된다. 남원마을 동구 앞에는 천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수고는 30m 이상이고 둘레는 약 8m가 된다. 전설에 의하면 이 나 무는 서산정씨(瑞山鄭氏)의 시조이 원외랑(院外郞) 정신보(鄭臣 保)가 송나라가 망하자 고려에 귀화(歸化)하여 이곳에 살때 심었 고 그의 아들이며 서산의 위인(偉人)인 양열공(襄烈公) 정인경 (鄭仁卿) 장군이 이 곳에서 말을 달리고 활을 쏘며 무술을 익혀 훗날 신창에 침략해 온 몽고군을 크게 쳐부시는 전공을 세웠다 는 것이다. 지금도 마을 주민들은 이 곳에서 매년 제사를 지내고 각자의 소원을 빈다고 한다. 또 은행나무 밑에 있는 바위에는 그때 말타 고 훈련하든 말발굽 자국이 있는데 이 바위를 파내려들면 갑자 기 뇌성과 벼락이 내리친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나무가지를 베거나 훼손하게 되면 그 사람은 얼마 안가 서 죽게 된다고 한다. 또 남원부락 뒷산에는 원외랑 정신보의 외손이며 호산록(湖山 錄)의 저자 한여현(韓汝賢)의 조부인 한영희의 묘가 있다. 남원 마을과 석지마을 앞에는 넓은 평야가 펼쳐지는데 이들을 이곳 사 람들은 “남한들”이라 하고 남원마을 앞 덕지천선 도로에 청지 천을 건너는데 놓여진 다리 이름도 “남한”다리라 부른다. 또 이곳 “남한”들에는 겨울이 되면 북쪽에서 날아온 두루미가 수 백마리씩 군학(群鶴)을 이루어 날고 내리고 하는 것이 장관을 이 루었으므로서 망운대봉 앞들 덕지천선 도로변에 “학도래지”라 는 천연기념물 지정표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학이 내리지 않는 것 이 30년 이상 넘어서 이제 그 표석도 없어졌다. 석지마을에서 남쪽으로 들판을 건너 양대동과 경계를 이룬 곳 에 융기하여 산봉우리가 된 것을 “당봉”이라 부르는데 이는 옛 날에는 석지앞들 깊숙히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을 때 어민이 많 이 거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선도 많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왜 냐하면 “당봉”이란 어업을 하지만 어선의 무사운항과 많은 어 획을 기원하는 당제 지내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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