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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암면 탑곡리(塔谷里) 글의 상세내용

『 음암면 탑곡리(塔谷里) 』글의 상세내용을 확인하는 표로 제목, 작성자, 등록일, 조회, 첨부, 내용으로 나뉘어 설명합니다.

제목 음암면 탑곡리(塔谷里)
작성자 서산문화원 등록일 2002-05-13 조회 1752
첨부  
탑곡리(塔谷里)는 넓이가 약 7㎢로 음암면 전체면적 44㎢중 약
15%를 차지 10개리중 도당리 다음으로 넓은 동리이다. 이러한
큰 마을에 탑(塔)이란 이름을 가졌으니 마을이니 마을 이름이
된 유래(由來)에 대하여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그 궁
금증을 규명해 볼 기회가 온 것이다.
조선시대의 탑곡리(塔谷里)지역은 여지도서(與地圖書)에 의하면
동음암면(冬音岩面) 소속의 안치리「鞍峙里」고양동리(古陽洞
里) 부산리(夫山里) 가토곡리(加土谷里)」등 4개의 동리가 있었
는데 구한말인 1895년의 행정구역 개편때「중곡(中谷里) 탑동(塔
洞里) 송내리(松內里) 녹두동리( 頭洞里) 안치리(鞍峙里) 고양
동리(古陽洞里)」로 변해서 조선지대에 있었던 부산리(夫山里)
와 가토곡리(加土谷里)가 없어진 대신 중곡리(中谷里) 탑동리(塔
洞里) 송내리(松內里) 녹두동리(頭洞里)와 같은 새로운 이름이
생겨난 것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이 19년이 지난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탑
동리(塔洞里) 중곡리(中谷里) 고양동리(古陽洞里)와 부산리(夫山
里) 일부가 합쳐져서 탑동리(塔洞里)에서 탑(塔)자를 따고 중곡
리(中谷里)에서 곡(谷)자를 따서 탑곡리(塔谷里)가 된 것으로 되
어 있다.
탑(塔-Pafoda)이란 원래 부쳐님의 사리나 유품등을 안치하고 공
양 기념하기 위해 세워지는 것으로 사찰의 부속으로 세워지는데
여러층의 높고 뾰죽한 타워(Tower)임이 특징인데 한국에서는 목
탑(木塔)이나 전탑(塼塔)도 있지만 석탑(石塔)이 주류를 이룬다.
따라서 탑곡리(塔谷里)라는이름이 생겼다면 이름을 얻을 만큼
옛 유적(遺跡)이 있었다는 전설이다.
석탑조각(石塔片)이라도 발견 되어야 할텐데 그러한 발견할 수
가 없다. 고로(古老)들에게 물어봐도 일관되게 모른다는 것이고
공통되고 종합된 의견은 탑(塔)이 있었다면 마을 전체의 중심이
되는 현 탑곡리(塔谷里) 1리내에 있었을 것이라 하나 1리(一里)
어느곳에도 그러한 흔적(痕適)은 발견할 수가 없다고 한다.
조선시대와 구한말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 개편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조선시대에 있었던 가토곡리(加土谷里)가 1895년에 갑
자기 없어지고 에전에 없던 탑동리(塔洞里)가 생긴것을 보면 가
토곡리(加土谷里)를 빠르고 된발음으로 하다보면 겾물?으
로 불리
워지다가 어느틈에 탑곡(塔谷)으로 표기되어 진 것 같다.
이러한 추정은 반드시 정확하다는 것은 아니다 근거나 연유는
어찌 됐건 탑곡(塔谷)이란 좋은 이름을 얻은 것은 마을을 위해서
는 정신적으로 위안을 가져 올 수 있는 좋은 일이 아닐수 없다.
탑곡리(塔谷里)는 서산에서 당진으로 하여 서울로 가는 국도(國
道)가 가로지르는 중요위치에 있는 마을로 북(北)으로 해발
283m 은봉산(銀峯山)이 웅장하게 자리하고 동(東)으로는 무르티
재(武陵峙)와 동암산(銅岩山)이 병풍(屛風)처럼 둘러싸인 안에
남(南)으로 향하여 얕은 구릉(丘陵)으로 그림처럼 펼쳐진 마을이
다. 지형적으로 구분해 본다면 세 개의 큰 개활지(開豁地)로 형
성되어 있고 고기의 등뼈처럼 잔구(殘丘)가 뻗어내린 곳에 높은
곳은 산(山)이고 조금 얕은곳은 밭(田)더 낮은곳은 논(沓)으로
되어 있는 중에 푸른 소나무 사이 사이에 형성된 촌락(村落)으
로 사람살기에 최상의 조건을 모두 갖춘 마을이다. 탑곡리(塔谷
里)에는 탑동(塔洞) 냉경동(冷耕洞) 가금외말(烏村) 길마재(鞍
峙) 송내(松內) 중곡(中谷) 무르티(武陵峙) 장주터마을 점말(店
村) 정착촌 노루목(獐項) 사스머리(鹿頭) 낭떨어지(斷崖村) 등
의 자연마을이 있고 무릉티고개(武陵峙) 안티고개(鞍峙) 산수논
(山水畓) 솔안논(松內畓) 수랑논(水 畓) 음수암(陰水岩) 참나
무서낭 청릉사지(靑龍寺址) 불땅굴 등의 지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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