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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암면 도당리(道堂里) 글의 상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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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음암면 도당리(道堂里)
작성자 서산문화원 등록일 2002-05-14 조회 1266
첨부  

도당리(道堂里)는 음암면 소재지로 도당(道堂)이란 이름은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지어진 것으로 구도동리에
서 도(道)자를 따고 전당리(錢堂里)에서 당(堂)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그런데 이마을 이름도 행정실무자에 의해서 기존의 마을명 글자
에서 취하여 지어졌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문양리(文陽里)나 다름
없이 큰 뜻이 담겨져 있다.
도당(道堂)이란 글자풀이대로 라면 길(道) 집(堂)이란 뜻이지
만 도청(道廳)이란 뜻과도 통하는 것으로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충청도(忠淸道)란 충주(忠州)와 청주(淸州) 지
방으로 가는 길이란 뜻에서 생긴 것이고 전라도(全羅道)는 전주
(全州)와 라주(羅州)지방으로 가는 길이란 뜻에서 생긴 것이다.
이 길목에 각수령들을 감독하는 지방장관을 두기 시작한 것은
고려때부터이다. 고려초기에는 무관(武官)인 절도사(節度使)를
12주(州)에 배치타가 뒤에 안무사(按撫使) 안렴사(按廉使)로 고
쳐지더니 고려 현종 3년(1012)에는 안
찰사(按察使)로 바뀌었는데 이때에 처음으로 충청(忠淸) 전라(全
羅) 경상(慶尙)등 3도(道)에 안찰사(按察使)를 두었다.
조선조 태종 13년(1413)에 경기 충청, 전라, 경상, 강원, 황
해, 함경, 평안등 팔도(八道)에 관찰사(觀察使)를 두므로서 이때
부터 지금과 같은 도(道)라는 행정구역이 생긴 것이다. 뿐만아니
라 조선시대 면명(面名)에는 길도(道)자가 들은 것이 많았던 것
을 보면 고대로 올라 갈수록 길(道)을 중심으로 행정구역이 획
정 되었던 것을 알수가 있다.
따라서 우연히라 하드라도 도당(道堂)이란 지명은 대단한 의미
가 있는 것이다. 최근 충청남도의 도청(道廳)이 대전광역시인 남
의 행정구역안에 있어 필연적으로 이전이 요구됨에 따라 충남서
북부의 여러곳에서 활발히 유치운동이 벌어지고 있는데 도당(道
堂)이란 도청(道廳)과 같은 뜻이 담긴 이름이므로 도당리(道堂
里)를 염두에 넣고 생각해 본다면 동북편에 은봉산(銀峯山)과 북
(北)에 간대산(艮台山)이 있어 이산들을 뒤로 하여 간좌곤향(艮
坐坤向)이나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하여 나븐들(羅盆野)쪽에
도청(道廳)이 위치한다면 얼마나 안성맞춤인가 생각해 본다.
현 도당리(道堂里)지역은 여지도서에서 보면 조선시대에는 구
수동(求水洞 왕시랑리(王時郞里) 구도동리(求道洞里)등이 위치
해 있었다. 구한말인 1895년 행정구역 개편때에는 구도동(求道
洞)과 왕시랑리(王時郞里)가 없어지고 새로히 화락이(花落里) 상
암리(上岩里)가 새로히 생겨났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는 전당이(錢堂里) 왕시랑리(王時郞里) 구도동(求道洞)과 부산리
(夫山里)일부가 합쳐져 도당리(道堂里)가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
다. 이때에 1895년에 있었던 화락이(花落里)와 상암리(上岩里)
가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이 모두가 포함된 것이다. 그후 1973
년 음암면 구성에 큰 축을 이루었던 수석리(壽石里)가 당시 서산
읍으로 이속 되었지만 현 음암면 전체면적 44K㎡중 약 9K㎡를 찾
이하는 큰 동리로 전체면적의 5분의 1을 점하는 큰 마을이다
그래서 현재 6리에 거주하는 주민간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잘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도당리(道堂里)에는 구수동(求水洞) 왕시랑이(王時郞里) 화락이
(花落里) 전댕이(錢 里) 구도동(求道洞) 바위백이(上岩里) 분투
골(夫山里, 盆土谷)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나븐들(羅盆野)고개, 쥐봉산(鼠峯山) 칼바위(刀岩) 공수골(公須
谷) 구수울냇갈 흰들산(白石山) 박석재냇갈· 모래샘물·방죽골
·서낭당터 위엉골 오얏골·옷샘(漆井)쪽다리들(石橋野) 고성지
(古城址) 등의 지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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