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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면 간월도리(看月島里) 글의 상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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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석면 간월도리(看月島里)
작성자 서산문화원 등록일 2002-05-14 조회 1271
첨부  

 

간월도리(看月島里)란 이름은 서산(瑞山)이란 군호(郡號)보다도
오랜 이름이다. 서령정씨(瑞山鄭氏)의 시조(始祖)가 된 원외랑
(員外郞) 정신보(鄭臣保)가 자기의 조국이었던 송(宋)가 원(元)
에 망하자 이곳 간월도(看月島)에 와서 정착했다는 기록으로 본
다면 서주(瑞州) 서산(瑞山)이란 군호(郡號)는 간월도리(看月島
里)에서 출생한 정신보(鄭臣保)의 아들이 되는 양열공(襄烈公)
정인경(鄭仁卿:1267원종8년-1365충렬왕 31년)이 나라에 큰 공을
세운 공로로 고려명종12년(1182)에 부성현이 폐군된지 102년만
인 고려 충렬왕 10년(1284)처음으로 서주(瑞州)라는 군호(郡 )
를 얻었었으므로 서산(瑞山)이란 시군호 보다도 위이고 흔히 서
산지방에서 회자되는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출생과 관련된 것 보
다는 훨씬 년대가 올라가는 것이다.
그뒤 조선시대에는 일관되게 서산군 화변면(禾邊面) 간월도리
(看月島里)란 지명으로 일관되게 지속되어 왔고 구한말인 1895
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태안군 안면면 소속으로 바뀌고 일제 강점
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도 마을명의 변화없이 안면면
(面) 소속의 서산군 소속이 된다.
1937. 7. 1에는 안면면 소속에서 부석면 소속이 되어 옛 화변
면 소속이었을 때 함께 했던 이웃마을들과 60여년만에 한면이 되
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간월(看月)이란 이곳에서 성장한 무학대사
(無學大師 일명 無鶴大師)가 간월암(看月庵)에서 수도(修道)할
때 맑은 바닷물속에 비친 달을 보고 성불하는데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전래되는 연원이다.
1619(광해군 11년)에 간행된 우리지역최고의 읍지 호산록(湖山
錄)에 의하면 원통대(圓通臺)는 간월도(看月島)연못 암석위에 있
다.
거사몽련(居士蒙年)이라 부르는 자가 있었는데 연못이 바다가운
데 무인절경(無人絶境)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모정(茅亭)을 짓
고 살기를 생각하고 찾아가 보았더니 천년된 고목(古木)백여그루
가 하늘을 닿을 듯하고 등나무의 넝쿨이 나무위를 덮고 있기 때
문에 해가 보이지 않고 인적이 끊기었다. 등나무 가운데를 보니
옛 기와 8백여장이 쌓여 있었다. 또 초당(草堂)의 황폐한 기지
가 있는데 추백(秋栢)나무 여러그루가 살아 있고 퇴락한 뜰 자욱
이 완연하여 옛 모습을 볼수 있으니 그곳은 양열공(襄烈公)정인
경(鄭仁卿)이 지은 초당의 옛 기지이고 그 기와도 역시 양열공
(襄烈公:정인경(鄭仁卿))이 개체 한 것이다.
그후에 거사몽년(居士蒙年)이 암자(庵子) 한칸을 짛고 쌓
였던
기와를 사용하여 덮었다고 한다.
그러한즉, 내가 친히 거사에게 들어둘 것이다. 얼마후에 내가 정
씨(鄭氏)족보를 보았드니 양열공(襄烈公)이 간월도(看月島)에 살
았는데 7-8세때부터 문장이 능숙했으며 정사(精舍:공부하는집)
를 건축하고 글이나 읽고 섬가운데서 고기잡이나 낚시질하는 일
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본읍사람 조안방(趙安邦)이 판관(判官)이 됐을 때 마침 시간을
이용하여 섬가운데를 가서 원통대(圓通臺)를 찾았드니 도리위에
현판이 걸렸는데 쓰기를 낙가산 원통사(落加山 圓通寺)라는 여섯
자 였다. 자획이 맑고 힘있어서 가히 사랑스러우며 근자에 서에
의 법칙에 명가로 자칭하는 자라도 능히 만분의 1분을 비슷할바
가 아니었다. 현판쪽은 아주 고고하고 판자에 사방으로 그린 줄
은 모두 좀벌레가 먹어 훼손 되었다.
10년후에 또 가서 보았드니 현판쪽은 없어지고 스님이 있다가
다가와서 말하기를 가야산(伽倻山)에 기맥과 정신이 모두 이섬
에 모였기 때문에 이섬에서 세성인(聖人)이 나온다 하였으니 가
야산을 떨치는자가 아닌가 의심이 간다. 황당 괴이한 중의 말이
다.
이곳 출신 양열공(襄烈公) 정인경(鄭仁卿)선생으로 인하여 오늘
날 까지 우리모두가 사용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관호(官 )가
있으니 서산사람으로서는 양열공(襄烈公)의 위업(偉業)에 대한
현창사업(顯彰事業)을 크게 벌리는 운동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간월도(看月島)란 천수만(淺水灣)속의 조그만 섬이 이렇도록 위
인(偉人)들을 배출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은 풍수상(風水上) 가
야산의 맥(脈)이 이곳으로 모였다는 것도 생각할수 있지만 이곳
이 고려시대에, 우리나라와 중국(宋나라)과의 사신(使臣)들이 왕
래하는 주요 통로였기 때문에 너무나 자연스런 현상이라 할수 있
다. 중국사신들이 송(宋)나라 수도였던 낭징(南京)에서 배를 타
고 고려땅에 오는 통로가 이 천수만의 끝 지점인 현 해미면 양림
리(良林里)에 있었던 양능포항(良陵浦港)에 배를 대고 내리어 산
수리(産水里)에 있었던 안흥정(安興亭)에서 쉬어서 오갔던 것이
다. 흔히 사신 다니든 곳이 현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안흥항으
로 알고 있지만 옛 사신 왕래길의 안흥(安興)이란 해미 "안흥(安
興)"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도 해미면 산수리에는 안흥정지(安興亭址)라는 표석(標石)
이 있고 주변의 300여평의 객관(客 )자리에는 무수한 와편(瓦
片)들이 쌓여 있어 옛날, 사신들이 오가든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
다.
1123(고려인종 1)에 송나라 사신 노윤적(路
允迪)을 따라 왔던 서긍(徐兢)이라는 사람이 당시 서울 개성에
서 1개월간 머무르면서 보고 들은바를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
는 책으로 쓰고 그려 40권으로 펴낸일이 있다. 이 책에서 안흥
(安興)으로 들어가는 산천경개(山川景槪)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
하고 있는데 아마 이 간월도(看月島)를 비롯한 천수만(淺水灣)일
대의 풍광(風光)일 것이다.
간월도(看月島)는 서산지방의 대표적 역사인물을 배출한 곳일뿐
더러 서산을 대표하는 특산품인 "어리굴젓"으로도 유명하다. 이
어리굴젓은 옛날"상감님"에게 올리는 진상품이었다고 전해지는
유명한 것으로 현대에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10여년전 일본
나라 여자대학 교수이며 서산과 일본천리시간에 자매결연에 큰
역할을 했던 와까야마(苦山)교수는 서산에 왔다가 이미 알고 있
었던 "간월도 어리굴젓"을 이것은 세계적인 명품이라면서 한통
을 구하여 가져간일이 있다.
"어리굴젓"이란 이름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을 내놓고 어리
란 매운 고춧가루를 넣어 먹으면 혓바닥이 어리해지기 때문이라
고 모방송에서 인터뷰하는 것을 보고 크게 실소한 일이 있다.
냉장시설이 없던 시절에는 늦여름까지 굴젓을 저장해 놓고 먹
기 위해서는 짜게 담그는 짠 굴젓이 있었고 그시그시 먹는 얼저
린 굴젓등 두 종류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어리굴젓이란 간을 덜짜게 담그는 "얼저린굴젓"이란 뜻
이다.
간월도(看月島)에는 원통대(圓通臺) 간월암(看月庵) 벌말(筏
村), 새말(新村)등의 지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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