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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산면 갈산리(葛山里) 글의 상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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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운산면 갈산리(葛山里)
작성자 서산문화원 등록일 2002-05-14 조회 1420
첨부  
갈산리(葛山里)는 조선시대에는 해미현 이도면, 회선동리(會仙
洞里)와 좌세리(佐世里)로 되어 있었는데 구한말인 1895년 행정
구역 개편때에는 갈현리(葛峴里) 회선동(會仙洞) 산지동(山芝
洞) 좌세리(佐世里)등 4개리로 분리되고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
정구역 개편때에 이네개의 마을이 합쳐지면서 갈현리(葛峴里)에
서 갈(葛)자를 따고 산지동(山芝洞)의 산(山)자를 따서 갈산리
(葛山里)가 되었다.
이미 용장리(龍獐里)편에 보았드시 오랫동안 나라에서 획정(劃
定)되어 왔던 회선동(會仙洞)과 좌세리(佐世里)의 지명(里名)에
서 근거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리명(里名)인 갈현리(葛峴里)와
산지동(山芝洞)에서 취(取)해 지므로서 전지명(前地名)은 단순
히 마을에서만 전해지는 지명으로 남게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것은 당시 이 사무를 취급했던 면사무소 실무자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갈산리(葛山里)란 한문글자 뜻대로라면 칡이 많이 있는 땅이란
뜻이다.
칡(葛)은 콩과(豆科)낙엽 만목(蔓木)으로 산이나 들(坪)에 흔
히 있는 것으로 뿌리는 한방에서는 갈근(葛根)이라하여 약재로
쓸 뿐만아니라 먹을 것이 없는 춘궁기인 봄에는 없는 사람들에게
는 식량을 대용으로 먹기도 하고 잎은 소의 먹이로 덩굴줄기의
속껍질은 청울치로서 자리를 매는 노끈을 꼬아만드는 재료이기
도 하고 갈포(葛布)의 원료로도 썼다.
이러한 여유로 현대에 와서는 무용지물이고 산림에서 크는 수목
에는 장애물이지만 칡(葛)은 옛날에 대단히 중요한 자원으로 쳤
던 것이
다. 때문에 칡(葛)자를 써서 지은 지명이 곳곳에 있는데 전국에
는 48개 면과 동리가 있다.
갈산리(葛山里)란 이름도 7개나 되는데 서산시관내에는 부춘동
내 갈산리가 있고 홍성군에는 갈산면(葛山面)이란 면명(面名)이
있고 당진군 순성면에도 갈산리(葛山里), 경기도 김포군 월곶면
갈신리(葛山里) 전라북도와 경상북도에 한 개동리씩의 칡(葛)자
를 쓴 갈산리(葛山里)란 지명이 된 것이다.
갈산리(葛山里)는 내포지방(內浦地方)의 중심이고 풍수상으로
는 서산지방전체의 조산(組山)이랄수 있는 가야산(伽倻山)이 태
안반도를 만들기 위해서 용트림하고 힘차게 서북부로 월주(越走)
해 넘어가는 기점에 융기해 이루어진 동암산(銅岩山)과 은봉산
(銀鳳山)의 동편의 사면(斜面)과 개활지(開豁地)에 펼쳐진 마을
이다.
이 마을의 지명중에는 660년 백제가 망하고 백제유민들이 660∼
663년까지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때의 역사적 사실과 밀
접한 관련이 있는 곳으로 대단히 중요한 곳이다. 갈산리(葛山里)
에는 좌세(佐世) 산지동(山芝洞) 회선동(會仙洞) 갈현동(葛峴洞)
등 자연 마을이 있고 무르티고개 무티울 향교골 죽가바위 골말
양지말 사백냥샘 시루벌 정문거리 고순다리 방죽골 쪽다리 왕샘
산막 장승거리 뒷골 월골 한양골 참샘모랭이 죽뿌리 무심이 준암
보 가루고개 모래고개 무르티소류지 송보(宋洑) 숙용골(宿龍谷)
쐐기들 사패 육거리 동암산성(銅岩山城)등의 지명이 있다.
좌세(佐世) 마을은 1759년에 간행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27가구
에 73명이 사는 마을로 당시 상황으로는 이세(里勢)가 평균 이상
의 거주하는 마을이었다. 현재의 좌세(佐世)마을은 갈산리(葛山
里)1리 2반 지역만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조선시대에는 갈산리 1
리 전체를 관활하는 마을의 이름이었다. 일반적인 마을의 이름
은 그지역의 자연환경에서 유래되는 것이지만 좌세(佐世)란 특이
한 마을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 여러차례 언
급되었지만 지명이 한자의 훈(訓)에 의한 것도 있고 훈(訓)과는
관계없이 음차(音借)한 것도 있으므로 옛일을 알아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좌세(佐世)의 한문뜻대로라면 세상의
어려움을 도운일이 있는 땅인데, 그러한 일이 언제쯤 어떻게 있
었을까를
여러 가지로 추정해 볼수가 있다. 앞으로도 이야기 되겠지만
첫 번째로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마한시대의 염로국( 路國)으로
추정되는 곳이 여미(餘美)이니 BC 2.3세기경의 일일까?
그러나 이때의 구체적 일들이 기록이나 이야기로 전해지는 것은
어느곳에도 없으니 지금으로부터 1338년전인 663년 백제의 부흥
운동때 부흥운동군이 주류성(周留城)에서 패한후 그의 가족과 같
이 최후로 모여 있었던 곳이 무테 였으니, 무티울 무르티고개등
은 바로"무테"로써 이때에 좌세(佐世)란 좋은 지명을 얻은 것이
아닐까 추정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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