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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산면 여미리(餘美里) 글의 상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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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운산면 여미리(餘美里)
작성자 서산문화원 등록일 2002-05-14 조회 1298
첨부  

여미리(餘美里)는 조선시대(朝鮮時代)에 해미현(海美縣)이도면
여미리(二道面 餘美里)였던 것이 1895년 행정구역 개편때는 여미
리(餘美里)와 리문리(里門里)로 분리되더니 일제강점기인 1914
년 행정구역 개편때는 다시 두동리가 합쳐져 서산군 정미면 여미
리(瑞山郡 貞美面 餘美里)로 되었었다.
1957. 11. 20 정치적 작용에 의하여 정미면(貞美面)이 당진군
(唐津郡)에 편입되는 바람에 당진군 정미면 여미로 되었다가
1973. 7. 1에는 여미리(餘美里)만 분리되어 서산군 운산면 여미
리(瑞山郡 雲山面 餘美里)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동리이
다.
여미리(餘美里)라는 이름은 마을 이름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적어도 기원전에 존재했던 부족국가(部族國家)에는 염로국( 路
國)으로부터 시원된 것으로 학자들이 비정(比定)하는 이름인 것
이다.
여지승람(與地勝覽)에서 보면 백제때는 여촌현(餘村縣) 신라(新
羅)때는 여읍(餘邑)이 되었었는데 한때 혜성군( 城郡:현 당진
군 면천지방을 관활하는군)의 영현1)(領縣)이 되기도 하였다.
고려초(高麗初)에 다시 이름이 바뀌어 여미현(餘美縣)으로 되
고 고려 현종 9년(1018년)에는 운주(運州:현 홍성군지방을 관활
하든 주)에 소속이 되고 예종(睿宗) 원년(1106년)에는 감무2)(監
務)가 배치되었었다.
조선조(朝鮮朝) 태종7년(1407년)에 현(縣)이 정해현(貞海縣)과
합쳐 지면서 이름을 정해에서 해(海)자를 따고 여미현(餘美縣)에
서 미(美)자를 취하여 해미현(海美縣)이 되면서 태종 13년(1413
년) 치소(治所)는 해미지방으로 옮겨져서 이때부터 한 개의 촌
마을로 전락하게 되었다.
따라서 여미리(餘美里)지방은 1400년 이상의 군현(郡縣)이상의
치소(治所)가 있는 지방의 중심지 였던 곳이다.
또 기록으로 보면 이곳에서 섰던 윗여미시장(餘美市場)은 1910
년대초 까지만 하여도 성시(盛市)를 이루었고 여미(餘美)란 이름
은 내포(內浦地方) 에서는 대단히 유명했던 이름이다.
이제는 여미리(餘美里)라는 마을명으로만 남아서 옛 역사나 문
화유적의 정취조차 잊혀져가는 아쉬움이 큰데 여미리(餘美里)에
는 너무말 바디말 서당골 이문안(里門內) 점말(店村) 대촌(大
村) 향교골(鄕校谷) 도당골 초막골(草幕谷) 사당재(祠堂谷) 구기
( 基) 선정묘(宣淸廟) 이택신도비(李澤神道碑) 이정방(李定邦)
과 이진백(李震白)의 묘(墓)와 비(碑) 장승거리(長 距離) 느티
나무군(槐木郡) 비자나무(榧木) 전라산성(田螺山城) 이문안고가
(里門內古家) 유정로고가(柳正魯古家) 여미미륵불(餘美彌勒佛)
천제당터(天祭堂址) 산제당터(山祭堂址) 여미벌(餘美坪) 등의 지
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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