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메뉴 닫기
서브페이지 배경
부석면 강당리(江堂里) 글의 상세내용

『 부석면 강당리(江堂里) 』글의 상세내용을 확인하는 표로 제목, 작성자, 등록일, 조회, 첨부, 내용으로 나뉘어 설명합니다.

제목 부석면 강당리(江堂里)
작성자 서산문화원 등록일 2002-05-14 조회 1007
첨부  

강당리(江堂里)는 조선시대(朝鮮時代)에 화변면(禾 面)10개리
중 우천리(牛川里)로 분리된 마을로 1759년(영조 35)에 간행된
여지도서(與地圖書)에 의하면 가구 131호에 232명의 인구가 사
는 가장 큰 마을이었다. 이것이 구한말인 1895년에 강촌(江村)
시동(詩洞) 서당동(書堂洞)등 3개 마을로 세분 되었다가 일제 강
점기인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때에 강촌(江村)마을과 서당동(書
堂洞) 일부와 시동(詩洞)일부가 합해져 한마을이 될 때 강촌(江
村)에서 강(江)자를 따고 서당동(書堂洞)에 당(堂)자를 따서 강
당리(江堂里)가 되었다.
강당리(江堂里)란 지명은 현 운산면 용현2리(雲山面 龍賢 2里)
의 조선조때 행정리명(行政里名)이었고 현재에도 자연부락명으
로 불리워 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지역사를 잘 모르는 학
자들이 글을 쓸때에 운산면 용현 2구의 옛 역사전거(歷史典據)
를 인용할 때 현부석면 강당리(江堂里)를 구분 못하여 잘못 인용
되는 오류가 왕왕(往往) 있어 왔다.
망등산(望登山 해발 83.6m)에서 발원하여 마을 중심을 흐르고
3km의 하천(河川)의 이름이 소내(牛川)로 불리워 졌고 이에 따
라 옛마을 이름이 우천리(牛川里)라 했던 것 같은데 두차례의 행
정구역 개편을 거치는 동안 원래 이름과는 거리가 먼 강당리(江
堂里)가 된 것이다. 이과정에 옛날 우천리(牛川里)에 속해 있었
던 시동(詩洞)의 많은 부분이 지산리(芝山里)로 편입되고 서당동
(書堂洞)의 일부는 칠전리(七田里)와 마룡리로 편입되어 나가므
로써 옛날에 이세(里勢)가 컸던 옛 우천리(牛川里)인 강당리(江
堂里)는 이웃과 경계한 옛 산저리(山底里)(1759(영조35년)당시25
가구)인 지산리(芝山里) 보다도 작은 마을이 되었다. 1992년의
간행된 부석면 면세일람에 의하면 지산리는 252호에 973명 사는
큰 마을이 되고 강당리는 196가구에 757명이 거주하는 마을로
된 것이다.
강당리(江堂里)에는 전주이씨 회안대군파(懷安大君派)가 80%이
상이고 그외에 서령유씨(瑞寧柳氏)문숙공 위촌유백순(韋村柳伯
淳)의 후손들 600여년 가깝게 세거해 오고 있는 토착(土着 集姓
村)마을이다.
마을이름의 머리글자가 된 강촌(江村)은 강당리의 동북변(東北
邊)에 위치한 자연마을인데 강(江)이란 이름을 얻을수 있는 어떠
한 자연 여건이 없는 마을임에도 무슨 연유로 강촌(江村)이란 이
름을 얻었을까 궁금하다.
현재는 매립되어 육지로 변한 A지구 간척지가 바다였을 때 이곳
을 거쳐서 고북면쪽으로 건너가던 바닷길이 있었는데 이러한 것
을 서산지방 방언으로는 감또는강(江)을 건넌다고 했으니 이에
서 연유된 것으로 생각해 볼수 있다.
강당리(江堂里)는 서쪽으로 칠전리와 접해 있고 북으로는 지산
리(芝山里)와 접해 있으며 남으로는 마룡리(馬龍里)와 접해 있으
며 옛부터 부자(富者)가 많아 부자마을로 이름 났었을뿐더러 크
고 작은 인물들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강당리(江堂里)는 서당동(書堂洞) 신당(新塘) 시어지(詩洞) 새
터(新基) 강촌(江村) 한터(大基) 배양골, 불너머리 각후동(角后
洞) 육간월(陸看月) 절굴(寺谷)등의 자연마을이 있고 어치기 저
수지(貯水池), 소내(牛川) 소내다리(牛川橋) 큰개(大浦) 동미(東
山) 동산정(東山亭) 두멍배미논 둥구재 말배미(斗畓) 망등산(望
登山) 문필봉(文筆峯) 배알산(拜謁山) 봉우재 불당골(佛堂谷)사
장터(射亭址)등의 지명과 숭덕사(崇德祠)가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