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메뉴 닫기
서브페이지 배경
부석면 지산리(芝山里) 글의 상세내용

『 부석면 지산리(芝山里) 』글의 상세내용을 확인하는 표로 제목, 작성자, 등록일, 조회, 첨부, 내용으로 나뉘어 설명합니다.

제목 부석면 지산리(芝山里)
작성자 서산문화원 등록일 2002-05-14 조회 956
첨부  

 

지산리(芝山里)는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산저리(山底里)로 불
리우던 곳인데 1895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산저리(山底里) 달천
리(達川里) 시동(詩洞) 지파동(芝杷洞) 도천리(桃天里)등 5개 마
을로 분리 되었다가 일제때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서 산저리
(山底里) 달천리(達川里) 지파동(芝杷洞) 도천리(桃川里)와 시동
(詩洞)의 일부를 합하여 지파동(芝杷洞)에서 지(芝)자를 따고 산
저리(山底里)에서 산(山)자를 따서 지산리(芝山里)가 되었다.
지산리(芝山里)는 해발 351m 도비산(都飛山)정상봉(頂上峯)의
남사면(南斜面)을 포함한 남동향(南東向)개활지(開豁地)로 아늑
하게 펼쳐진 마을이다.
마을 전체의 형상(形象)은 풍수상(風水上) 좌청룡(左靑龍) 우백
호(右白虎)가 뚜렷하게 잘 이루어 졌고 높이솟은 도비산(都飛山)
이 서북풍(西北風)을 막아주고 남동(南東)으로 확트인 천수만(淺
水 ) 바다와 접해 있어서 어염시수(漁 柴水)를 잘 갖춘 곳으로
농경사회(農耕社會)에서는 사람살기에 어느곳보다도 유리했던 곳
이다.
그래서일까 서산지방에서는 입향(入鄕)의 역사가 긴 서령유씨
(瑞山柳氏)50여호를 비롯한 전주이씨 회안대군파(全州李氏懷安大
君派)100여호 평양조씨(平壤趙氏)50여호가 500∼600년간을 집성
촌(集姓村)을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온 것이다.
지리적 자연 여건이 좋아서일까 이마을에는 수백년전으로 올라
가는 효자 국현남(鞫賢男)과 유동원(柳東源) 그리고 그의 부인이
며 효부인 밀양손씨(密陽孫氏)등 2개소의 정려(旌閭)가 있다.
마을 주민의 인심이나 향풍(鄕風)이 어떠했었던가를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 산업화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960년대에서 70년대초까지만 하여도 서산지방은 현대적 산업
시설이 거의 없는 농촌지대 였었다.
이 시기에 서산군(현 태안군 지역 포함)내에서 논 밭(田畓) 지가
(地價)가 가장 비싼 곳으로도 이름났었는데 원인은 한정된 지역
내에서의 토지의 부족도 있었지만 비교적 자연적 수리원(水利源)
이 좋고 토질이 비옥했기 때문이었다. 고로(古老)들에 의하면 이
곳주민들은 어느 곳 보다도 인심좋은 것이 가장큰 자랑이라 하였
다.
지산리(芝山里)에는 도요동, 달천(達川) 지파동(芝杷洞) 구억말
(九億村) 남아시들 벌어지 문뱅이 산재(山底) 방아다리, 벌떡운
지 등의 자연마을이 있고, 관청 모랭이 등우골 물바위 무릅절터
말등산 대숲모랭이와 같은 지명이 있으며 동사(東寺)와 국현남
및 유동원의 효자정려가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