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산리(芝山里)는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산저리(山底里)로 불 리우던 곳인데 1895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산저리(山底里) 달천 리(達川里) 시동(詩洞) 지파동(芝杷洞) 도천리(桃天里)등 5개 마 을로 분리 되었다가 일제때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서 산저리 (山底里) 달천리(達川里) 지파동(芝杷洞) 도천리(桃川里)와 시동 (詩洞)의 일부를 합하여 지파동(芝杷洞)에서 지(芝)자를 따고 산 저리(山底里)에서 산(山)자를 따서 지산리(芝山里)가 되었다. 지산리(芝山里)는 해발 351m 도비산(都飛山)정상봉(頂上峯)의 남사면(南斜面)을 포함한 남동향(南東向)개활지(開豁地)로 아늑 하게 펼쳐진 마을이다. 마을 전체의 형상(形象)은 풍수상(風水上) 좌청룡(左靑龍) 우백 호(右白虎)가 뚜렷하게 잘 이루어 졌고 높이솟은 도비산(都飛山) 이 서북풍(西北風)을 막아주고 남동(南東)으로 확트인 천수만(淺 水 ) 바다와 접해 있어서 어염시수(漁 柴水)를 잘 갖춘 곳으로 농경사회(農耕社會)에서는 사람살기에 어느곳보다도 유리했던 곳 이다. 그래서일까 서산지방에서는 입향(入鄕)의 역사가 긴 서령유씨 (瑞山柳氏)50여호를 비롯한 전주이씨 회안대군파(全州李氏懷安大 君派)100여호 평양조씨(平壤趙氏)50여호가 500∼600년간을 집성 촌(集姓村)을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온 것이다. 지리적 자연 여건이 좋아서일까 이마을에는 수백년전으로 올라 가는 효자 국현남(鞫賢男)과 유동원(柳東源) 그리고 그의 부인이 며 효부인 밀양손씨(密陽孫氏)등 2개소의 정려(旌閭)가 있다. 마을 주민의 인심이나 향풍(鄕風)이 어떠했었던가를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 산업화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960년대에서 70년대초까지만 하여도 서산지방은 현대적 산업 시설이 거의 없는 농촌지대 였었다. 이 시기에 서산군(현 태안군 지역 포함)내에서 논 밭(田畓) 지가 (地價)가 가장 비싼 곳으로도 이름났었는데 원인은 한정된 지역 내에서의 토지의 부족도 있었지만 비교적 자연적 수리원(水利源) 이 좋고 토질이 비옥했기 때문이었다. 고로(古老)들에 의하면 이 곳주민들은 어느 곳 보다도 인심좋은 것이 가장큰 자랑이라 하였 다. 지산리(芝山里)에는 도요동, 달천(達川) 지파동(芝杷洞) 구억말 (九億村) 남아시들 벌어지 문뱅이 산재(山底) 방아다리, 벌떡운 지 등의 자연마을이 있고, 관청 모랭이 등우골 물바위 무릅절터 말등산 대숲모랭이와 같은 지명이 있으며 동사(東寺)와 국현남 및 유동원의 효자정려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