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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면 칠전리(七田里) 글의 상세내용

『 부석면 칠전리(七田里) 』글의 상세내용을 확인하는 표로 제목, 작성자, 등록일, 조회, 첨부, 내용으로 나뉘어 설명합니다.

제목 부석면 칠전리(七田里)
작성자 서산문화원 등록일 2002-05-14 조회 1006
첨부  

칠전리(七田里)는 전회 봉락리(鳳洛里)편에서 밝혔듯이 조선시대
까지는 옷밭(漆田)마을인 칠전(七田里)였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1895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옷밭(漆田)마을이라는 칠전리(七田里)
라는 이름은 없어지고 일부는 봉동(鳳洞)과 낙양리(洛陽里)로 되
고 일부는 금굴리(金堀里) 사점리(沙店里)로 분리되고 일부는 서
당동(書堂洞)으로 분리 편입 되었었다.
일제때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금굴리(金掘里)사점리(沙店
里)가 합쳐지고 서당동(書堂洞)일부가 분활 되어 칠전리(七田里)
라는 마을이 되었다.
칠전리(七田里)는 옷밭(漆田)에서유래된 것이지만 어느새 유래와
는 아무런 관련없는 일곱칠자(七)로 쓰여지는 바람에 글자 뜻대
로라면 일곱 개의 밭이 있는 동리가 되었다.
칠전리(七田里)는 동서간(東西間)은 1km 미만의 넓이로 좁고 남
북(南北)은 긴 마을이어서 북쪽 봉락리(鳳洛里)경계 지점에서 남
쪽 마룡리(馬龍里)경계지점 까지는 4km가 넘는 긴 마을이다.
그럼에도 이장(里長) 한 사람이 관할하는 단리(單里)마을이기
때문에 북쪽마을 주민과 남쪽마을 주민간에는 접촉 기회가 작은
마을이다.
마을회관이 있는 중심 마을은 지금도 옷밭골(漆田谷)이라 부르
는데 이 근방에는 지금도 옷나무들이 약간 남아 있어 옛 잔영(殘
影)을 엿 볼수 있다고 한다.
최근 학계나 행정기관의 연구기관에서 생활문화의 옛 유적지나
유물에 대한 조사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데 고분(古墳)도요지
(陶窯址)와요지(瓦窯址) 불적(佛蹟)등 현시적(現示的)으로 나타
나는 것에 한하여 조사하고 이러한 각종 옛물품을 만들어 내는
기능(機能)과 장인(匠人)들의 기술 수준과 유래에 대하여는 소홀
한 것 같다.
이곳이 89가구가 사는 옷밭(漆田)마을이 었다면 그들이 만들어
냈던 물건은 무엇이며 그 질이나 용처는 어디였을까? 그러한 모
든 것들에 대한 것을 흔적이라도 찾아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이나,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고 세계 일류국가
가 된 것은 기술자를 최우대하는 정책에 기인 된다는 것을 이해
한다면 화변소(禾 所)<기술자 집단 거주지>를 상징하는 칠전(七
田)이라는 마을의 유래나 내력에대한 같은 연구가 거듭되어야
할 것이고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옷나무(漆田)에 대한 보호대책
도 있어야 할 것이다.
칠전리(七田里)에는 성적골(聖積谷) 옷밭골(漆田谷) 손부락재,
통개(桶浦) 금곡(金谷) 해빈여(海濱嶼) 지지골 서근들뿌리, 사기
점(沙器店) 국사봉(國師峯) 왜봉산(倭峯山) 서당동(書堂洞)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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