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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면 봉락리(鳳洛里) 글의 상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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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석면 봉락리(鳳洛里)
작성자 서산문화원 등록일 2002-05-14 조회 1042
첨부  

조선시대에는 봉락리(鳳洛里)라는 독립된 마을이 없었다. 현
봉락리 대부분은 화변면(禾 面)칠전리(漆田里)에 속해 있었던것
으로 추정된다. 구한말인 1895년 행정구역 때에 1)칠전리(漆田
里)가 칠전리(七田里) 낙양리(洛陽里)노라포리(老羅浦里)네개 마
을로 분리 되었다가 일제때인 1914년에 낙양리(洛陽里)의 일부
와 봉동(鳳洞),노라포리 그리고 칠전 일부가 합쳐져서 봉락리(鳳
洛里)가 되었다.
그동안 지명(地名)의 변천사를 문헌과 현지조사를 통해 확인해
보면서 알게된 것은 현대감각과 상상만으로는 이해 할수 없는 것
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미 전편에서 언급해 왔지만 조선조
때 행정구역이 일정한 산맥이나 하천등 명확한 경계에 의하여 획
정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엉뚱하게도 남의 행정구역안에 섬
처럼 들어가 있는 월경처(越境處) 상아비입지(象牙飛入地)와 같
이 이해할수 없는 것이 많을뿐더러 일도면(一道面) 이도면(二道
面) 동도면(東道面)같이 길(道)을 기준으로 행정구역이 획정 되
었던 것을 알수가 있다.
화변면(禾 面)지역은 신라시대에서 조선조 초기까지 있어 왔
던 2)향소부곡(鄕所部曲)의 한 종류인 화변소(禾 所)가 있었던
곳이다. 소(所)란 이미 다 아는 바와 같이 공예품을 제조하던 기
술자 집단의 거주지이다.
칠전(漆田)이란 옷칠을 생산하는 옷나무 밭이란 뜻이다. 칠(漆)
은 현대 사회에서도 도료(塗料)로는 가장좋은 것이지만 조선조
에 있어서는 칠(漆)을 사용한 나전(螺鈿)등 일상용 가구(家具)
는 물론이고, 죽염에 쓰는 관(棺)까지도 칠을 사용한 것이 최고
로 쳤던 것이니 이 지역은 현대의 안목으로 본다면 대단한 기술
이 있는 산업기지 였다고 볼수 있다.
조선 영조 35년(1759)년에 작성된 여지도서(與地圖書)에서 보
면 칠전리(漆田里)는 가구가 89호 인구 234명의 두 번째로 큰 마
을이었다.
현재의 칠전리(七田里)에서 금곡(金谷)사기점(沙器店) 서당동
(書堂洞)지역이 제외되었던 점을 감안 한다면 칠(漆)의 원료생산
과 가공에 종사했던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많았는가를 가늠할수
있다고 본다.
봉락리(鳳洛里)에는 검은돌(黑石) 탕정(湯井) 수캐골, 사고개
(祠峴)산골(山谷) 서낭댕이(城隍堂) 낙양동(洛陽洞) 봉동(鳳洞)
노라실(老羅室) 노라포(老羅浦) 봉락저수지(鳳洛貯水池) 감나무
골(枾木谷)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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