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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면 남정리(南井里) 글의 상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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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지면 남정리(南井里)
작성자 서산문화원 등록일 2002-05-30 조회 953
첨부  

 

남정리는 조선조에는 공수동리(公須洞里)라 불러왔는데 구한말
1895년의 행종구역 개편때에 남산리(南山里) 갈산리(葛山里) 정
동리(井洞里)로 한때 바뀌어졌었고 그후 19년뒤가 되는 1914년
일제(日帝)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때에 이미 있어온 세 마을과 마
산면 월계리(馬山面 月溪里) 일부를 합하여 남산리(南山里)에서
남(南)자를 따고 정동리(井洞里)에서 정(井)자를 따서 남정리(南
井里)로 된후 오늘에 이른 것이다.
조선때에 부르던 공수동(公須洞)이란 마을이름은 이제 그곳에
사는 토백이조차 잊혀져가는 이름이지만 불과 100년도 않되는 옛
날에는 마을의 주된 이름이었을뿐더러 가구수가 85호에 인구 218
명이 사는 현 인지면 지역내에서는 가장 큰 마을이었었다.
공수동(公須洞)의 자연부락은 현 남정리1구 마을로서 뒤에 일
시 무슨 연유인지 갈산리(葛山里)와 정동리(井洞里)로 나뉘었다
가 남정리로 바뀌는 과정에 공수동(公須洞)이란 지명은 아예 자
취조차 감추어졌다.
공수동(公須洞)이란 이름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건대는 토질
이 비옥하고 수원이 좋아서 사람살기에 좋은 조건을 모두 갖추었
을뿐더러 청금산을 뒤로 하고 산세가 수려한 곳이어서 서울의 유
명한 선비들이 이곳에 입향세거를 이루고 살았으므로 생겨난 이
름이라고 한다.
한편으로는 토질이 비옥한 관계로 옛날 이 마을에서 세금을 많
이 내는 마을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어느것이 바른것인지는 알
수 없다고 고로(古老)들은 말한다.
다만 이 마을에는 10여기에 가까운 고인돌군(支石墓群)이 있
고 또 오랜 옛날부터 있어왔던 전근대의 주요 산업시설인 야철지
(冶鐵址)와 도요지(陶窯址) 그리고 둔전들(屯田野)이 있다. 따라
서 이러한 연유로 공변될 공(公)자와 모른지기 수(須)를 넣은 마
을 이름이 생겨났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된다.
그중에서도 둔전(屯田)이란 군대의 군량을 수급을 위하거나 궁
전(宮殿)이나 관아(官衙)에 딸렸던 땅을 말하는 것인데 마을내
둔전들(屯田野)이 있었으니 이러한 것을 이해한다면 공수동(公須
洞)이란 이름은 너무나 자연스런 이름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된
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마을은 고대에서 최근세에 이르기까
지 역사적 유적이 너무나 많은 마을이다. 앞으로 이러한 여러 가
지 내용을 좋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규명해볼 가치가 큰
마을이다.
현 마을의 이름 두문자(頭文字)의 근거가 된 남산리(南山里)
란 남정리 2구의 자연부락 명칭을 말하는 것인데 북으로 해발
202m가 되는 유명한 청금산을 뒤로하여 마을이 남쪽으로 펼쳐져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 같고 마을 이름의 중간자가 된 정동리(井
洞里)는 마을내에 좋은 우물이 있어 한섬지기(4,000) 논에 안전
관개할 수 있을 만큼 많은 물이 자연용충 될뿐더러 수질이 좋아
서 온 동리 주민이 식수로 사용하였기에 자연스럽게 샘골(井谷)
이란 지명이 생겨났었다.
다만 공수동(公須洞)의 중심마을들은 1895년에 돌연히 칡산마
을이란 뜻의 갈산동(葛山洞)으로 변경되었는데 그 경위나 연유
는 지금에는 알 수가 없다. 이 마을에는 옛날 밀양박씨, 전주이
씨, 창녕조씨 등이 20호 내지 30호씩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왔었
으나 최근년에는 모두 떠나고 창녕조씨(昌寧趙氏)들만 남아 여러
집 세거해 오고 있다.
남정리(南井里)에는 공수골(公須谷) 새앙골(井谷) 가장골(假葬
谷) 점터(冶鐵址) 점말(店洞) 고인돌군(支石墓群) 둔전들(屯田
野) 남살미(南山) 안골(內洞) 장장산(葬場山)과 지방문화재인 김
두징의 묘비(金斗徵 墓碑)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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