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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면 대두리(大頭里) 글의 상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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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석면 대두리(大頭里)
작성자 서산문화원 등록일 2002-05-30 조회 1005
첨부  

 

대두리(大頭里)라는 이름은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화변면(禾 
面)대두리(大頭里)로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일관되게 쓰여오다
가 1895(고종32)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마산면 대두리 낙양리(馬
山面 大頭里 洛陽里)와 화변면 대두리 낙양리(禾 面 大頭里 洛
陽里)등 4개마을로 분할 운영된 일이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14
년에는 2개의 대두리(大頭里)와 낙양동(洛陽洞)일부가 합쳐져 부
석면 대두리(浮石面 大頭里)로 되었다.
이제까지 읍면동의 행정구역을 살펴본바로는 아래 하부조직인
동리(洞里)에서만은 분할내지 변동이 있어 왔는데 이 대두리(大
頭里)에서만 화변면(禾 面)관할에서 마산면 (馬山面)으로 일시
일부가 분할 편입 되었던 일이 있었음을 알수가 있다. 여지도서
(與地圖書)에 의하면 조선시대 화변면 대두리(禾 面 大頭里)는
가구수(家口數)가 71호에 207명(남105명, 여 102명)의 인구가 사
는 큰 마을이 었다.
대두리(大頭里)라는 이름은 1994년에 발행된 서산의 문화 제6
호 p54, 강동원(姜東源)이 쓴 대두리 지명유래에 의하건대 대두
리와 봉락리 경계선상에 있는 해발 70m의 산 이름이 한점산(一
点山 : 漢点山)인데 이 한점산 머리근처 마을이라는 뜻이라하고
작다는 의미가 한점(一点)이 크다는 의미의 한점(漢点)으로 변하
여 대두리(大頭里)라 한 것 같다고 조심스러운 언급을하고 있다.
그러나 백제사를 연구한 사학자 김성호(金聖昊)는 「비류백제
(沸流百濟)와 일본의 국가기원(國家起源)」에서 대두리(大頭里)
란 비류백제(沸流百濟)가 졸본부여(卒本扶余)에서 다물도(多勿
都)에 나라를 세웠는데 다물(多勿)이란 복,구토(復 舊土)라는 어
원이었다 하고 이 다물계(多勿系)지명으로 서산부석면의 대두리
(大頭里)도 포함 시키고 있으며 그런데 일본(日本)으로 건너간
도왜집단(渡倭集團)의 중심세력을 이 다물계집단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두리(大頭里)라는 지명은 단순한 한점산(一点山)에
서 연유되었다고만 볼수가없고 이 다물계(多勿系)지명의 역사적
사실을 규명 한다면 이 대두리(大頭里)라는 지명을 역사의 중심
에서는 새롭게 조명을 받게 될 것이다.
대두리는 서두에서 언급되었듯, 조선시대에는 마산면(馬山面)
과 화변면(禾 面)의 경계 지점이었고 1895년에는 4개의 마을로
구분되었던 경계 구분이 복잡한 지역이다. 현재에도 부석면 소재
지인 취평리의 남쪽에 위치 경계해 있는 마을로 외부인들에게는
경계 구분이 어려운 마을이다.
대두리에는 고래들, 고래모퉁이 고리짝베미 논, 구억말, 내건
너, 느리재, 다락골, 당재(堂峙), 당재골(堂峙谷), 대두저수지
(大頭貯水池), 동산, 뒷굴(後谷), 들마당(野場),띠밭모랭이, 마
룻들, 말무덤, 말무덤재, 매봉재, 모얀, 부엉굴, 부엉배, 사양골
(斜陽洞), 서낭당(城隍堂), 수랑배미(水 畓) 아래말(下村), 양
지편(陽地便), 오릿굴(五里谷·鴨谷) 웃말(上村) 장자마당터, 점
산(点山), 중탱이, 차돌배(石英岩)등의 자연마을과 지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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