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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봉면(八峯面) 글의 상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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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팔봉면(八峯面)
작성자 서산문화원 등록일 2002-05-30 조회 1177
첨부  

팔봉면(八峯面)이란 이름은 조선시대나 구한말까지는 없던 이름
이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팔봉면(八峯面)이
라 명명한 것은 면내 중심에 우뚝 솟은 해발 361m의 높은 산 이
름에서 딴 것인데 이 산에 대한 것은 세종실록지리지, 여지승람
등 옛 문헌에는 어느 곳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었는데 1619년
(광해군 11)에 편찬된 서산 최고(最古)의 읍지(邑誌)1)인 호산록
(湖山錄)에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면 조선시대에 이 지방은 어떤 면명을 가졌던 것일까?
현 호리 2,3구에 있는 구도( 島)는 옛날에 이곳에 일시 수군
(水軍) 파지도만호(波知島 萬戶)2)가 배치되어 있어서 현 호리
(虎里)를 중심으로하여 팔봉면의 많은 부분이 이 파지도 만호의
직활 관활구역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 팔봉면 지역은 1895년 구한말의 행정구역 개편 전까
지는 서산군의 문현면(文峴面), 영풍창면(永豊倉面), 노지면(蘆
旨面) 금곡리(金谷里), 마전리(麻田里), 태안군 동일도면(東一導
面) 고역리(古驛里:현 팔봉 진장리2구) 태안군 북일도면 고파도
리(北一導面 古波島里)3)등 2개군 4개면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
던 것인데 1895년(고종32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노지면의 금곡리
(金谷里)와 마전리(麻田里)가 영풍창면(永豊倉面)으로 편입되고
2개군(2個郡)으로 나뉘었던 고파도리(古波島里)가 문현면 소속에
서 태안군 북일면(泰安郡 北一面) 단일소속으로 되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영풍창(永豊倉面)과 문현면(文峴面)
4)이 합해져 팔봉산(八峯山)의 이름을 따서 면명(面名)으로 할
때 행정구역도 일부 조정이 되는데 문현면 연화리(文峴面 蓮花
里)가 지곡면(地谷面) 소속으로 떨어져 나가고 태안군 북일면 고
파도리(古波島里)가 다시 팔봉면으로 편입되고 태안군 동이도면
고굴리(古堀里)일부와 고성리(古城里)일부가 진장리(榛墻里)로
편입되어 팔봉면 소속이 되었다.
이러한 행정구역의 변화로 볼 때 현재의 면명(面名)이 된 팔봉
산(해발361m)은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어느면(面)에 편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노지면(蘆旨面) 문현면(文峴面) 영풍창(永豊倉
面)등 3개면의 경계지점에 있었으므로 중요한 산으로 기록되지
않았는지 모른다.
팔봉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호산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다.
「팔봉산은 군청의 서쪽 바닷가에 있는데 여덟 봉우리가 기이하
게 산위로 나열되어 있으므로 팔봉산이라 칭하는데 그 가운데에
첫째 봉우리가 운암사(雲菴寺)뒤에 있어서 가장 우뚝하게 뛰어났
으며 삼면이 모두 석벽아래 에는 또 창암절벽이 있어서 날아 다
니는 새가 아니고서 능히 오르지 못한다.」
또「임진년 난리에는 효릉참봉(孝陵參奉) 김호설(金好說)과 서
생 김덕용(金德容)이 백성을 모아 성(城)을 쌓고 피난할 계획을
세웠었다.」하고
제봉 고경명(高敬命)이 서산 군수로 있을 때인 1582년(선조15
년) 극심한 한해로 백성들이 어려움에 있을 때 이산에다 기우제
를 지냈더니 군수가 관아로 돌아오는 길에 비가 내리어 가뭄이
해갈되었고 그후 1895년(선조28년)에도 극심한 가뭄이 있자 군
수 유량(綬梁)씨가 역시 목욕재개하고 이산에다 기우제를 지냈더
니 미쳐 산을 내려오기도 전에 비가 내려 가뭄에서 백성을 구했
다는 기록이 있다.
면명(面名)이된 팔봉산(八峯山)은 빼어난 경관이 좋을뿐더러
이제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주요 등산코스로 이름나 있다. 호산록
(湖山錄)에서 바위와 절벽으로 나는 새가 아니면 능히 오를 수
없다던 것은 옛이야기에 불과하다.
휴일이면 이곳 지방사람이나 먼 곳에서 찾아오는 등산객으로
이제 사람들의 심신을 단련하는 주요 장소이다.
이러한 좋은 산 이름을 면명으로 한 이 지방에 필시 훌륭한 인
물(人物)들이 끊임없이 배출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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