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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면 화수리(花秀里) 글의 상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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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지면 화수리(花秀里)
작성자 서산문화원 등록일 2002-05-30 조회 922
첨부  

 

조선조시대에는 화수리(花秀里)라는 마을 이름은 없었다. 그 시
대에 노지면(盧旨面)내에는 망치리(芒峙里) 성산리(星山里)가 있
었는데 이 두마을이 1985년 구한말 행정구역 개편때에 화계리(花
溪里) 반계리(磻溪里) 성산리(星山里) 수현리(秀峴里)로 분할되
었다가 다시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때에 이를 통합하
여 화계리(花溪里)에서 화(花)자를 따고 수현리(秀峴里)에서 수
(秀)자를 따서 화수리(花秀里)라 한것이다.
조선시대의 망치리(芒峙里)는 가구가 60호에 152명의 주민이 살
고 있었고 성산리(星山里)는 16호에 39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는
데 현 화수리1구로 된 옛 성산리(星山里)땅에는 83가구에 271명
의 인구가 살고 있다.
옛 망치리(芒峙里) 땅인 화수리2구에는 94호에 39명의 인구로
늘어나 옛날과 같이 성산리 부락 보다는 망치리(芒峙里)쪽의 가
구와 인구수가 많지만 증가추세로 본다면 1구쪽 성산(星山)마을
이 훨씬 더 늘어났다.
옛 망치리(芒峙里)라는 마을 이름이 어떻게 생겼었느냐는 것
은 이제 어느 누구도 알턱이 없고 마을내에서 모든 것을 잘 알
수 있으며 이곳에 수대째 세거해오고 있는 고로(古老)들도 이제
는 그런 이름조차 처음으로 들어보는 것이라하니 금석(今昔)지감
을 갖게 한다.
다만 마을위치와 상황을 종합해 추론해 볼 수밖에 없는데 마을
내의 주산(主山)이며 배산(背山)인 해발 203m의 웅장한 역마산
(역마산:일명 열매산)에 망초(芒草)인 봄이면 일찍이 나물싹이
돋아나서 가난했던 조상들의 생활에 큰 힘이되어 주었기에 생긴
지명일 것으로 추리해볼 수 있다.
부근 둔당리에 싹둔자(芚)자로 이름이된 둔산(芚山)이 있고 인
접해 있는 싹망(芒)자로 붙인 망치리(芒峙里)가 있는 것을 보면
이는 모두 나물과 관련있는 지명일 것이다. 나물중에도 벙구, 두
릅같은 가시있는 나물이었을 것이다.
성산리(星山里)라는 이름은 현 풍차주유소 뒷산을 이름하는 것
인데 화수리2구 뺏재(秀峴)마을에서 동북쪽으로 건너다 보면 샛
별이 이산위에 떠오기 때문에 별뫼(星山)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
인데 별뫼(星山)마을이 별미(星山)으로 변한것이다.
화수리(花秀里)라하면 뺏재(秀峴)라는 이름이 더 유명하고
이 "뺏재"라는 이름의 한문
기가 빼어나다로 이해하여 수현(秀峴)이라 하여 이제 이마을 이
름으로 정착되어 가고 있다.
우리지방의 최고읍지 호산록(湖山綠)에서 서산지방의 토품(土
 )을 논함에 있어서 성전노답(聖田蘆畓)이라 했는데 이는 서산
지역내에서 밭으로는 상상품이 성연면(聖淵面) 밭이요 논으로는
상상품이 노지면(蘆旨面) 답(畓)을 쳤던것인데 바로 이 상상답
(上上畓)이 화수리 논을 말하는 것인데 이런것도 빼어난 마을이
된 연유가 아닐까 한다.
따라서 예나 지금이나 인지면 화수리하면 물좋고 땅이 비옥하
여 생강, 마늘을 비롯한 높은 소득작물을 재배해서 살기좋고 풍
요로운 마을로 정평나 있다.
화수리에는 화계리(花溪里) 반계리(磻溪里) 별미마을(星山里)
뺏재마을(秀峴里)등의 자연마을이 있고 분투골(盆土村) 양지촌
(陽地村) 우산촌(雨傘村) 잿말(城洞) 큰말(大村) 토골말(基谷
村) 가재골망(蟹谷) 절골(寺谷) 여덟마지기보(八斗落洑) 일곱마
지기 중보(仲洑) 돌보다리 화수교(花秀橋) 안장바위(鞍裝岩)등
의 지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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