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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면 차리(車里) 글의 상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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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지면 차리(車里)
작성자 서산문화원 등록일 2002-05-30 조회 1022
첨부  

차리(車里)라는 마을 이름은 동리(洞里)이름으로서 최초의 기록
인 조선조때 여지도서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1895년의
구한말 행정구역 개편때에 비로소 노지면(盧旨面) 차리(車里)라
는 이름이 나오고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노
지면(盧旨面), 차리(車里), 임서리(林棲里), 용연동(龍淵洞)의 3
개 마을이 합쳐져서 차리(車里)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
면 1895년 이전의 조선조때에의 이름은 무어라 했을까? 여지도서
에 나오는 노지면 마을의 기록중 현재에는확인이 않되는 우산리
(牛山里) 마전리(麻田里), 금곡리(金谷里)라는 3개 마을이 있
다. 이중 마전리(麻田里)와 금곡리(金谷里)는 1895년 구한말 행
정구역 개편때에 현 팔봉면의 전신인 영풍창면(永豊倉面)에 편입
되고 우산리(牛山里)는 계속 노지면(盧旨面)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는 이 우산리(牛山里)라는 마을
이 어느곳에도 흡수된 흔적이 없이 없어져 버렸다. 여지도서에
나오는 마을중 노지면내에서는 가장 많은 가구수인 80호의 가구
가 거주하던 마을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 마을은 어느곳
에 흡수된 것일까.
조선조때의 우산리(牛山里)가 1895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차리
(車里), 임서리(林棲里), 용연동(龍淵洞)으로 분리되었다가 1914
년에 다시 차리(車里)라는 마을 이름으로 합쳐진 것은 아닐까.
섣부른 단정도 않되는 것이지만 조심스런 접근으로 추론해 볼 수
가 있다.
필자는 풍수지리에 대하여 연구한 바도 아는 바도 없고 그것
을 신봉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서산이라는 우리지방에 대한
산천의 전체 형승의 대강을 그려 볼 수는 있다. 지형상 서산지방
의 핵(核)이라 한다면 차리지역(車里地域)이 아닐까 생각이 되
는 것이다. 가야산맥이 서쪽으로 달려와서 성왕산(聖王山)을 이
루고 이 성왕산(聖王山)의 줄기가 서쪽으로 넘어와 비룡산(飛龍
山), 장군산(將軍山) 그리고 금강산(金剛山)으로 건너와 역마산
(驛馬山), 열매산 등의 수려하고 웅장한 산속에 펼쳐진 마을, 이
곳이 가장 한국적인 자연을 갖춘 곳이 아닐까 생각이 되는 것이
다.
현지에 가서 확인해 본 바로는 전승되어 내려오는 산(山)의 이
름과 지도상에 명기된 이름에 차이가 있어 혼동을 갖게 하는 것
이다.
국토지리원에서 작성된 각종의 지도에서는 이 마을의 핵심이되
며 마을내에서는 장군산(將軍山 해발352m)이라 부르는 산이 금강
산(金剛山)이라 표기되어 있고 지도상에 장군산(將軍山)은 이 마
을에서는 금강산(金剛山 해발203m)이라 부르는데 이 두가지 중
한가지는 옳은것과 잘못된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외부에 있는 풍수가들은 이곳에 서각산(犀角山)1)이 있
다하고 따라서 이 지방에는 서우망월형(犀牛望月形)이 있는데 이
곳은 대현(大賢)과 대부(大富)와 문무장상(文武將相)이 나오는
만대영화지(萬代榮華地)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서각산(犀角山)이 바로 마을에서는 장군산(將軍山)이요 지
도상에는 금강산(金剛山)이라 부르는 산(山)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산리(牛山里)라 부르는 마을 이름도 이에서 유
래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1895년 이전
의 조선조때는 이마을 이름이 우산리(牛山里)이었을 것이다. 마
을이름의 변천은 조선시대 우산리(牛山里)가 구한말엔 차리(車
里) 임서리(林棲里) 용연동(龍淵洞)으로 변화되고 이것이 다시
1914년 차리(車里)로 통합된 것이다.
1895년부터 1914년까지 19년이나 있어왔던 차리(車里) 임서리
(林棲里) 용연동(龍淵洞)의 마을이름외에 마을내에는 구역말( 
驛村) 서낭댕이 수랑재(水 峙) 오얏골 중말(中村) 산제당(山祭
堂) 작은골(小谷) 큰골(大谷) 장군산(將軍山) 금강산(金剛山) 수
리봉(鷲峯) 역마산(驛馬山) 열매산 등의 소지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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