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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면 산동리(山東里) 글의 상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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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지면 산동리(山東里)
작성자 서산문화원 등록일 2002-05-30 조회 975
첨부  

산동리(山東里)란 조선시대이후 인정면 산저리(仁政面 山底里)
와 동막리(東幕里)로 나뉘어 있어왔던 마을을 1914년 일제에 의
한 행정구역 개편때에 두 동리를 하나로 합치면서 산저리(山底
里)에서 산(山)자를 따고 동막리(東幕里)에서 동(東)자를 따서
산동리(山東里)라 한것이다.
산저리(山底里)란 이름은 마을의 서편에 경사가 급하고 남북으
로 길게 평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해발 351.6m의 도비산(都飛山)
1)의 동편에 위치하여 부채살같이 개활지(開豁地)로 펼쳐진 지형
이어서 붙여진 산(山)밑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 지
역 사람들이은‘산재’라 부른다.
동막리(東幕里)란 마을의 동편이 되는 산동리와 부석면의 경
계를 이루는 지점에 옛날 4∼5가구의 주막집(酒幕家)이 있으므로
써 동쪽 주막동네라는 뜻의 마을 이름이 생긴것이다.
옛주막이란 단순히 술만을 파는 곳이 아니다. 오가는 길손에
게 술도 팔았지만 밥도 팔고 잠도 재워주는 여관(旅館) 역할도
하였던 것이다.
이 동막(東幕)의 주막거리는 부석면 남부지방인 지산리, 강당
리, 칠전리, 마룡리, 창리를 비롯한 간월도리와 안면도 본도를
비롯한 황도리 지역에서 서산장을 이용하는 중요 래왕하는 거리
의 쉼터 기능을 하든 곳으로 최근세까지 그 기능이 살아 있었으
나 도로의 확장과 포장이 되면서 그 거리나 집들은 형적조차 없
어졌다.
외딴 이 주막 동리가 동막(東幕)이란 마을이름으로 되어 널리
이름이 났던 것은 그곳에서 촌사람들의 투전판도 벌어졌을 것이
고 남녀가 유별했던 옛시절에 주모(酒母)와 얼킨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도 있었으련만 그러한 것을 찾아보는 것은 이제 세월과 자
연이 너무나 변해버렸다.
산동리마을은 도비산(都飛山)이란 비옥한 산밑에 있는 마을이
어서 그런지 논밭이 비옥하고 수원이 좋아서 풍요로운 마을이다.
산동리(山東里)는 모월리(毛越里)와 같이 조선조이전까지는 인
정부곡(仁政部曲)2) 소숙이 아니라 위포소(葦浦所)3)지역에 속
해 있었던 곳이다.
따라서 갈대바다(葦浦)라는 이름과 같이 이 마을 해안은 천수만
(淺水灣)내에서는 어족자원이 가장 풍부하여 갈치, 숭어, 농어,
망둥이, 꽃게, 대하, 황발이등이 엄청난 량으로 잡히던 곳이다.
특히나 동막 황발이라면 서산장에서는 알아주던 것이었다.
따라서 동구앞 바닷가에는 늘 10여척의 어선이 매여 있었다.
또 주목망(柱木網)4)어업인 크고 작은 어살(漁箭)5)이 수십개가
있었다.
그외에 화염(火鹽)의 소금굽던 벗(筏)이 5개소나 있어서 많은
양의 소금을 생산해서 부(富)를 이루던 곳이다.
이러한 마을 여건때문인지 1759년(영조 35)에 발간된 여지도에
서 보면 산저리(山底里)는 35호의 가구에 103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고 동막리(東幕里)에는 25호에 60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음
이 확인된다.
이때에 이러한 수의 가구가 인구는 한 마을의 가구나 인구로는
많은 수치인 것으로 마을의 역사가 오래되고 깊은것임을 알 수
가 있는 것이다.
산동리에는 산재, 구억말, 석천암(石泉庵), 범바위(虎岩), 평풍
바위(屛風岩), 칼바위(刀岩), 마당바위(場岩), 학돌재(鶴回峙)
와 소새발, 당재(堂峙), 동막(東幕), 큰말(大村), 잿백이(城
峙), 돈판, 광대가리(庫頭), 상나무골(香木谷), 지아집골(瓦家
谷), 부엉바위( 岩), 정각정사, 살막금(箭幕村)등의 지명이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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