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직동의 지명유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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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동남구문화원 | 등록일 | 2001-11-22 | 조회 | 14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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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직 동 사직이란 왕조의 주권을 이르는 말로 社는 토신(土神)을 뜻하고 稷은 곡신(穀神)을 뜻하는 것으로 군왕이 등극할때는 사직에 제 사를 지내고 나라의 흥성을 제사지내던 곳을 사직단이라고 하였 다. 1920년 지방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읍내리를 갈라서 남산정 이라고 하였다가 1946년 해방이 된 다음해에 왜식 동명을 없애 는 행정에 따라 이곳에 있었던 사직단의 이름을 따서 사직동이라 고 하였다. 남산(南山) 사직동의 남쪽 천안시장의 끝에 있다. 936년 고려태조 왕건이 8 만 7천 5백의 대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신검을 토벌하기 위하여 이곳 천안에 머무를 때 태조 곁에 있었던 술사 "예방"이라는 사 람이 천안의 지형지세를 살펴보고 간하기를 오룡쟁주(五龍爭珠) 의 지형이라고 하였다. 오룡쟁주란 다섯 마리의 용이 구술 하나 를 놓고 서로 얻으려고 싸우는 지세로 이곳 남산을 구슬(여의주) 로 보았다. 남산은 외떨어진 잔구로 어느 산에도 연결되지 않았 고 독립되어 있는 구룡이다. 조선시대는 사직단이 있어 사직에 제사 지내던 곳이고 일제때는 그들의 신사가 세워져서 많은 시민 을 강제로 참배시키던 곳이며 해방후에는 시민공원으로 조성하 여 오늘에 이르렀다. 남산비석가(碑石街) 해방이전 까지만 해도 남산아래 도로변에 많은 비석이 있었다. 관찰사 어사 군수의 선정비나 불망비등이다.(약 20여개) 그러나 도로확장과 주택건립으로 지금은 한 개도 없다. 비석이 많이 있 었던 거리라 비석거리라고 하였다. 용주정(龍珠亭) 남산 위에 있는 정자다. 1963년 지금의 중앙국민학교 앞에 있었 던 천안객사(客舍)가 낡아서 헐고 그 일부를 남산에 옮겨 세운 것이다. 본래 이곳에는 정자가 있었으나 (용주정의 뒤)없어지고 그 자리 옆에 세웠다. 수선정(水仙亭) 지금의 사직동 15번지에 있었던 정자. 옛 천안의 동헌(東軒) 앞 에 있었다. 인위적으로 큰 연못을 파고 목 가운데에 돌로 축대 를 쌓아 섬을 만들고 멀리 유량천에서 물을 끌어대어 못에 물을 고이게 하고, 고였던 물은 남쪽으로 빠지게 하였다. 못가에는 수 선화를 심어 꽃피게 하였다고 수선정이다. 수선정이 세워졌던 정 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1988년 중앙시장앞 도로에 전화선 매 설공사를 할 때 수선정의 정자 기둥이였던 것으로 보이는 8각 돌 기둥이 출토되어 구 천안문화원 마당에 보존되고 있다.(영성상회 의 주인 이선영시의 신고)이 돌기둥이 출토된 곳이 수선정이 있 었던 것으로 보인다.(지금의 중앙시장 네거리 외환은행 앞의 도 로)천안에 있었던 정자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정자로 알려지 고 있다. ※ 왜정 초기에 수선정을 헐어 남산의 남쪽 기슭에 옮겨 세웠으 나 그것도 없어지고 지금은 주추만 남아 있다. 이홍복의 기문이 남아있다. ※ 서릿말(西里) 천안시장(市場)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수도주물공장을 중심으 로 오늘날은 살기좋은 주택지로 가꾸어지고 있다. 천안을 대분하 여 東里와 西里로 구분할 때 불렀던 마을 이름이다. 東里는 지금 의 영성동과 원성동지역을 말하고 반대가 되는 지역을 西里라고 하였다. 일제때는 솥(釜)을 만드는 솥공장이 전쟁에 사용되는 무 기제조공장으로 둔갑을 하였고 일본인들이 한반도에서 본국으로 쌀을 가져가기 위하여 포장용 가마니를 만드는 공장도 이곳에 있 었다. 최근에는 시장이 형성되고 국도가 통과되며 경부선철도가 지나면서 급속히 발달된 마을이다. 사직단(社稷壇) 옛날 조선조때 토신과 곡신을 위하여 제향을 올리던 제단. 지금 의 남산위에 있었으며 토신과 곡신을 제사하였음은 국가의 번영 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 것으로 군수가 주제하였다. 사직단은 일제에 의하여 헐어 없어지고 그 자리에 일인들의 신사가 세어졌 다가 해방후에는 용주정이 세워졌다. 온양나드리 천안에서 온양으로 가는 길목을 말한다. 이 길을 통하여 서산, 당진으로 통하였고 태안반도 일대로 갈 수 있었다. 조선왕조의 왕실들도 이 길을 통하여 온양에 행차하였다. 지금은 경부선철도 에 가로막혀서 지하도가 설치된 뒤로는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 다. 잿백이(작은 잣백이) 온양나드리 지하도에서 사직동 시장으로 넘어가는 고개. 대흥동 과 사직동의 경계가 된다. 재는 峙로 고개를 뜻하는 것이고 배기 는 마루턱을 말한다. 천안의 동서 관통로로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으며 상점이 집중되어 있어서 상권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 다. 낙천관골(樂天館谷) 천안극장 앞 광제의원 옆에 일제때 낙천관이라는 요리집이 있었 다. 천안에서는 가장 큰 술집으로 경향각지에 이름이 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