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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명동의 지명유래 게시판 상세보기

[천안서북구문화원] - 지명 내용 상세보기 입니다.

제목 봉명동의 지명유래
작성자 서북구문화원 등록일 2001-11-22 조회 1256
첨부  
 
봉 명 동

천안군의 하리(下里)면 지역이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 통폐합
에 따라 의항리(蟻項里)와 다가리(多可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봉
서산(鳳棲山)의 이름을 따서 봉명(鳳鳴)이라 하여 영성면(寧城
面)에 편입되었는데 1920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영성면이 천
안읍에 들게 되는 동시에 본동을 둘로 갈라서 봉명정 산평정(山
平町)이라 하다가 1946년 왜식동명을 없애고 町을洞으로 고치고
山平町은 多可洞으로 고쳐서 각기 독립되었다. 옛부터 닭이 천마
리면 봉이 한마리 있다고 하는 속담과 같이 최근 봉명동에는 병
아리 부화장이 많아 세워져서 많은 병아리 속에 봉의 새끼 한 마
리쯤 태어나서 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동이다.

봉서산(鳳棲山)(158m)
흔히 말하는 개목부락의 뒷산이다. 천안시가지의 서쪽을 감싸고
있는 야산으로 두정동의 노태산과 연결되어 그 남쪽은 月峰山에
이어지고 있다. 봉황새는 상상의 새로 봉은 수컷이고 황은 암컷
이다. 다른 말로 주작(朱雀)이 라고도 부른다. 古代 묘의 벽화
에 많이 그려졌던 새로 태평성대인 요순시대에 한번 지상에 왔었
고 아직은 지상에 온 일이 없다고 한다.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
지 않고 죽실(竹實)이 아니면 먹지를 않으며 西江이 아니면 목욕
하지 않고 온몸이 붉은 깃털로 싸여있는 신성스러운 새로 전해지
고 있다. 봉서산은 봉황새가 깃들어 살고 있는 산이라고 하여 봉
서산이다.

봉서산 선사유적지(先史遺蹟地)
1965년 봉서산 중턱에 세워진 청황사(靑黃寺)의 주지 이일섭씨
가 뒷산에서 斷面圓 形의 검은색 돌도끼를 수집하여 보고 하므로
서 시작되어 1965년 10월 2일 三佛 金元龍박사가 발굴을 시작한
곳이다. 유물의 출토지는 낮은 산상으로 지금은 모두 밭을 일구
어 파괴되었고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이나 타제석기와 함께
홍도(紅陶) 즐문토기편(櫛文土器片)이 끼어 있어 신석기대 말기
에서부터 청동기시대 초기까지의 선사인의 서식지로 알려지고 있
다. 1986년 향토사학자들의 재조사에 의하면 비록 표면 채집이기
는 하지만 무문토기유적(無文土器遺蹟)이면서 홍도기 출토며 또
석기도 마제돌도끼 이외에 차돌타제석기(石英打製石器)와 반달모
양돌칼(半月形石刀)과 같은 석기류가 수집되는 것으로 보아 흥미
있는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
대가 같은 장소에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공존하였음을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며 차돌로 만든 석기류는 앞으로 무문토기 유적에
의 우리들의 새로운 주의를 환기하는 것이며 더욱 연구하고 살펴
보기 위하여 봉서산의 유적지는 잘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개목(蟻項:개미목)
봉명동에서 가장 북쪽에 있으며 자연부락으로는 가장 크다. 마을
의 지형이 개미의 목처럼 생겼다고 개미목이라고 하였다. 또는
개목은 犬項이라고도 하여 개의 목과 같이 생겼다고도 전한다.
개목마을의 형성은 시대적으로 보아 천안시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미 선사시대에 이루어졌다.(앞의 선사유적지에서 밝혔
음) 옛날 아산지방의 바닷가에서 생산되는 소금과 내륙지방의 곡
식이 교환되는 곳이기도 하였다. 백성동 고개 넘어에 소금쟁이라
는 마을이 있다. 소금쟁이는 소금장이로 염시장(鹽市場)을 말하
는 것으로 이 소금장은 개목마을과 직결되는 곳이다. 개목
의 "개"는 "支"와 같은 뜻으로 "本"만 못한 것이다. 고로 개목
은 支項으로 불러도 좋은 곳이다. 소금쟁이만은 못한 곳으로 작
은 물물이 교환장소이다. 선사시대의 인류라고 소금을 먹지 않
은 것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개목남근석(男根石)
개목마을의 동구 앞에 있었으나 시가지 조성과 도로 확장으로 원
자리에서 세워졌다. 옛부터 우리나라는 동구 앞에 돌을 세워 마
을의 표식을 하였다. 그 표식돌은 여러 가지 형태로 되었으나 주
로 많은 것은 男根石이다. 남자의 性器를 닮아서 그것을 직립으
로 세워 머리가 하늘을 쳐다보게 세워졌다. 선사시대에 男兒選好
思想과 풍요사회를 기원하던 표식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기념비
적 역할도 하였다. 개목부락은 이미 선사시대에 조성된 마을이
라 이와 같은 男根石이 세워졌다. 우리나라 농촌마을에 "산돌
말"아리는 곳이 많다. 이것은 立石村으로 先史社會의 유풍이다.
입석은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기도 하였고 신앙의 대상으로 이용
되어
왔던 Menhir이다.

부챙이(富倉里, 富昌里:부창리)
천안고등학교를 바라보아 왼편의 골짜기를 가르킨다. 옛날에 부
자들이 많이 살았고 그들의 창고가 많이 있었다고 부창리라고 하
였다고 한다. 사실은 지금부터 백년전까지만 해도 집이 없었던
곳이며 미라골로 넘어가는 오솔길이 있었을 뿐이다.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이것에 와서 광산을 개발하고 금광을 일구었던 곳으로
지금도 흰 복사가루가 동산과 같이 쌓여 있다. 금광은 해방직 후
에 없어지고 주택들이 들어서서 옛날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병막(病幕)
지금의 천안의료원 자리다. (도립병원) 옛날에 전염병 환자나 나
환자들을 격리 수용하던 곳이라 "병막"이라고 하였다. 병막을 다
른말로 병마개라고도 불렀다. 왜정때까지도 병막으로 이용되었으
나 지금도 도립천안의료원이 설치된 것으로 보아 옛부터 병원과
관계가 깊었던 곳으로 지명이 미래를 에언했다고 보아야 겠다.

씨알농장
1960년대 초반 우리나라 종교계와 신학계의 거성이었던 함석헌옹
이 경영하던 농장으로 그는 이곳에서 손수 농장을 경영하며 많
은 논문과 저서를 남겼다. 지금은 농장이 없어지고 주택이 들어
섰다.(경일주택 아파트)

차돌고개(眞石 : 直石)
봉명동에서 가장 남쪽이다. 고개의 반대편은 다가동이고 고개너
머는 쌍룡동이다. 차돌고개는 천안에서 온양온천으로 가는 국도
이며 대도로이다. 도로가 확장되기 이전에는 소로길이었으나 교
통량이 확산되면서 증폭되었다. 도로가 확장되기 이전에 양쪽 길
가에 차돌이 박혀있어서 차돌박이라고 하였다.